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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이가 직접 만든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 제품으로 만들어진 소스를 사서 먹는 것보다는 훨씬 이득이라고 했다.
 제굴이가 직접 만든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 제품으로 만들어진 소스를 사서 먹는 것보다는 훨씬 이득이라고 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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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시. 침대로 가서 누워야 할 제굴은 부엌으로 갔다. 토마토 세 개에 칼집을 넣어서 끓는 물에 데쳤다. 껍질을 벗겨서 으깼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는 다진 양파와 마늘을 넣어서 볶았다. 바질과 파슬리, 월계수 잎도 넣었다. 거기에 으깬 토마토와 파마산 치즈를 넣고 끓였다. 25분쯤 뒤에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가 만들어졌다.

"강제굴, 잘 시간 넘었잖아!"
"냉장고에 토마토가 많아요. 그래서 스파게티 소스 한번 만들어 봤어요. 이거 자연드림(생협)에서 사면, 만 원 정도 하잖아요. 앞으로 소스는 내가 만들어도 되겠어요. 토마토 세 개에 3천원 조금 넘거든요. 양파랑 나머지는 집에 다 있으니까."

다음 날, 제굴은 생애 최초로 생긴 자신의 체크카드(잔액 5만 원)를 들고 장 보러 갔다. 채소 살 때마다 가격 때문에 망설였던 방울 양배추를 샀다. 1kg에 1만5천원, 신이 나서 집으로 왔다. 채 썬 방울 양배추를 카프레제 샐러드 위에 조금 올렸다. 끓는 물에 버터를 녹이고(엄마는 버터를 싫어해서 적당량을 고민했음) 소금 간을 해서 방울 양배추를 데쳤다.

비싸서 망설였던 방울 양배추. 제굴은 생애 처음으로 생긴 체크카드로 방울 양배추를 샀다. 샐러드도 만들고, 버터와 소금을 넣고 데치기도 했다.
 비싸서 망설였던 방울 양배추. 제굴은 생애 처음으로 생긴 체크카드로 방울 양배추를 샀다. 샐러드도 만들고, 버터와 소금을 넣고 데치기도 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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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은 스파게티 면을 삶으려고 냄비에 물을 붓고 끓였다. 전날 만들어놓은 스파게티 소스를 냉장고에서 꺼냈다. 물이 팔팔 끓었다. 스파게티 면을 꺼냈다. 유심하게 봤더니 쌀벌레 같은 벌레가 한 마리 있었다. 유통기한을 보니까 2017년. 제굴은 식양청에 신고하자고 맘을 먹었다. 그러나 식양청 홈페이지는 열리지 않았다. 

"요리할 마음이 팍 가셨어요. 근데 갑자기 큰형(제굴의 사촌형, 우리 옆 동 산다)이 족발이랑 치킨 있다고 밥 먹으러 오래요. 작은형네 식구들도 왔다면서 내가 한 음식도 들고 오래요. 사실 좀 그랬지. 큰형수님이랑 작은형수님 입맛에 방울 양배추가 안 맞을까 봐요. 원래 버터 많이 넣고 데쳐야 하는데 엄마가 까다로우니까 조금만 넣고 했잖아요." 

제굴의 사촌형들과 형수들은 자세가 아름다웠다. 음식을 먹어보기도 전에 감탄하고는 사진부터 찍었다. '셰프'라고 치켜세워줬다. 그러나 두 살, 다섯 살인 제굴의 조카들은 솔직담백했다. 제 엄마가 샐러드 속의 치즈만 골라서 먹여줘도 뱉어냈다. 제굴은 개의치 않았다. 좋아하는 육식을 기분 좋게 먹었다.

제굴의 클라스! 결혼한 사촌형들이 세 명, 조카도 여섯 명이다. 우리 옆 동에 사는 큰형은 제굴이가 고기 좋아한다며 갑자기 밥 먹으러 오라고 했다.
 제굴의 클라스! 결혼한 사촌형들이 세 명, 조카도 여섯 명이다. 우리 옆 동에 사는 큰형은 제굴이가 고기 좋아한다며 갑자기 밥 먹으러 오라고 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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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아, 쏘야(소시지야채볶음) 어때? 셰프가 해 주는 술안주 좀 먹어보자."

영민(제굴의 큰형)이가 말했다. 영남(제굴의 작은형)도 "오호!" 환호성을 질렀다. 제굴은  '쏘야'를 해 본 적 없다. 형네 집 주방에 들어가는 것도 어색해서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래도 제 큰형이 부엌으로 가자 뒤따라갔다. 제굴은 양파를 채 썰어서 볶고, 소시지를 넣었다. 영민은 볶고 있는 음식에 고추장과 케첩을 넣으려고 했다. 제굴은 "형, 물에 풀어서 넣어요. 안 그럼 되직할 걸?"이라고 했다.

'쏘야'를 그릇에 담아서 거실로 온 영민. "제굴이는 '쉽쥬?' 하는 백종원이야. 완전히 잘 하대요"라고 했다. 제굴은 큰형의 칭찬을 듣지 못했다. 혼자 부엌에 남아서 뒷정리를 했다. 그릇을 싹 설거지 하고, 싱크대도 정리했다. 우리 집에서 가져온 접시(이모가 음식을 예쁘게 담으라고 사다주었음)도 씻어서 따로 챙겨 놨다.        

집에 온 제굴은 한숨을 쉬었다. 프라이팬과 도마, 그릇들이 싱크대 안에 처박혀 있었다. 나는 "비켜! 엄마가 치울게. 너는 네 일이나 해"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저녁밥 먹고 치우는 건 제굴의 일. 그냥 해줘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제굴아, 꽃차남 좀 씻겨"라고 했다. 제굴은 내 말을 "꽃차남이랑 좀 싸워"라고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열 살 차이 나는 '의좋은' 형제의 '달달한' 말다툼 소리가 들렸다. 쿵쾅 거리는 소리까지. 형보다 늦게 태어난 게 억울한 꽃차남은 제굴의 방으로 갔다. "형형이 아끼는 거 없애버릴 거야" 하면서 레시피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레시피 노트의 뒷면, 글씨가 안 써진 부분을 골라 찢어냈다. 동시에 제굴의 주먹이 꽃차남에게 나갔다.

제굴은 올해 6월부터 레시피 노트(담임선생님이 무척 신경 써 주심)를 쓰고 있다. 자칭 보물 1호. 노트 스프링이 휘었다고 엄청나게 속상해 했다. 음식 사진을 오려서 붙일 때도 공을 들인다. 그런데 고이 모셔 두지는 않는다. 침대나 책상 위, 거실 탁자나 식탁 위에서 굴러다닌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레시피 노트 찾는다고 난리가 난다.       

자칭 보물 1호인 제굴의 레시피 노트. 제굴은 '과대표장된 이미지로 환상을 심는 건 경계해야 된다는 것이다'에 형광색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자칭 보물 1호인 제굴의 레시피 노트. 제굴은 '과대표장된 이미지로 환상을 심는 건 경계해야 된다는 것이다'에 형광색으로 밑줄을 그어 놓았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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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레시피 노트 갖고 선규샘(중학교 때 다닌 수학학원 선생님)한테 갔어요. 학원 다닐 때, 숙제도 안 해갔잖아요. 공부도 진짜 안 하고. 근데 지금 이렇게 잘 한다고 보여주고 싶었지. 선생님이 나중에 노트 낡아서 펼 수도 없게 되면 갖고 오래요. 노트 오래 보관하게 해 줄 거래. 그리고 나보고 한국에서 요리사로 살기 힘드니까 호주로 가래요."

제굴은 중학교 때 수학학원에 다녔다. 성적하고는 관계 없었다. 수업 끝나고 친구들이랑 노는 걸 좋아했다. 나는 학원비 내는 날마다 '그만 다니라고 할까' 고민했다. 제굴은 다니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 입학해서는 "학원 헛 다닌 거 아니에요. (학원에서) 성헌이 안 만났으면, 아는 애 없어서 '혼밥' 했을 거예요"라고 큰소리 쳤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한단다.

"3년 동안 학원비 낸 거 천만 원 정도 하지요? 그 돈이면, 식기세척기도 더 좋은 걸로 살 수 있는데. 다른 것도 좀 사고요."

고등학생이 된 제굴은 느닷없이 밥 하겠다고 했다. 나는 '야자 하기 싫어서 그럴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림을 그리겠다고, 축구를 하겠다고, 바이올린을 하겠다고 했을 때처럼, "그래 해 봐"라고 했다. 그 뒤로 8개월, 방과 후에 저녁밥을 하던 제굴은 아침에도 혼자 일어난다. 좋아하는 웹툰을 보면서 스스로 차린 밥을 먹는 게 낙이라고 했다.

여전히 제굴의 관심분야 1위는 게임, 그 중에서 '하스스톤'. 내가 전혀 모르는 세계다. 우리는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서로 짜증내면서도, 말을 많이 한다. 제굴은  나에게 웹툰 <송곳>이 휴재 중인 것을 알려준다. 유럽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노조 교육 한다는 것도 말한다. 그리고는 확신하듯 묻는다.

"엄마, 내가 커서 노조 하면 엄마는 무조건 하라고 할 거지요?"
"해도 되지.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노조 하라고 하잖아. 근데 우리나라 노조는 고통 많이 당하니까 엄마는 걱정 많이 될 거야. 더구나 요리사는 노조 자체가 거의 없대."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면 호주 갈 거예요. 해도 거기 가서 할 걸?"

열일곱 살,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대학 안 가요. 수능도 당연히 안 봐요"라는 말도 변심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내 수준에서 아들이 하겠다는 일을 돕고 싶다. 기쁘게 해 주고 싶다. "엄마가 이렇게 신경 쓰고 있다이" 하면서 생색을 내고 싶다. 생협에 가서 제굴이가 쓰는 스파게티 소스를 사다 놨다.

방과 후, 제굴은 '필'이 꽂히는 날은 저녁 메뉴 할 장을 봐서 집에 온다. 장을 안 봐도 큰 문제는 없다. 집에 온 제굴은 옷을 갈아입고 손을 꼼꼼하게 씻는다. 놀고 있는 꽃차남한테 가서 괜한 시비를 걸어본다. 그리고는 부엌으로 와서 냉장고 안을 살핀다. 어제, 냉장고 안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던 제굴은 좀 당황했다.  

"엄마,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 왜 사다놨어요? 만들어 먹는 게 더 이득이라고요. 이렇게 제품 사면 돈 아깝잖아요. 우리 집에 진짜 필요한 건 감잔데... 몇 개 없다고요."

제굴이 만든 오븐감자요리.
 제굴이 만든 오븐감자요리.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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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은 부엌 베란다에서 쭈그러든 감자 몇 개를 꺼내왔다. 이틀 전에 인터넷에서 본 음식을 하기로 했다. 감자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칼집을 냈다. 오븐을 예열하는 동안, 칼집 낸 감자 안에다가 버터와 치즈, 설탕과 소금을 적당히 넣었다. 예열된 오븐에 감자를 집어넣었다. 삼겹살로 수육도 했다. 방울 양배추도 다듬어서 데쳤다.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면, 꽃차남은 "강제굴, 세상에서 제일 싫어" 하면서도 부엌으로 간다. 제 형이 접시에 음식을 담기도 전에 먹고 싶다고 한다. 제굴은 그때 좀 행복하다. 어제는 끓고 있는 수육 중에서 작은 걸 골라서 호호 불어 꽃차남에게 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꽃차남은 화장지를 꺼내서 냅킨을 만들어 수저를 놓았다.

"내년에 초등학교 가면 어쩔라고 그래?"

제굴은 내가 할 잔소리를 한다. 꽃차남은 아직도 식탁예절이 몸에 배지 않았다. 돌아다니고, 혼자서 젓가락질도 잘 안 한다. 나는 피곤하니까 얼른 쉬고 싶어서 꽃차남 밥을 떠먹인다. 제굴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어제는 "엄마가 설거지 할게"라고 했다. 제굴은 소파로 가서 당당하게 스마트폰을 했다. (밥 하는) 기술 가진 사람이 집 안을 지배한다.^^

제굴은 밥상을 차리고, 꽃차남은 화장지로 냅킨을 만들어서 수저를 놓았다.
 제굴은 밥상을 차리고, 꽃차남은 화장지로 냅킨을 만들어서 수저를 놓았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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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레시피 노트, #기술 가진 사람이 지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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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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