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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굴이 만든 가지 요리. 나는 속이 안 좋아서 한 개만 먹었다.
 제굴이 만든 가지 요리. 나는 속이 안 좋아서 한 개만 먹었다.
ⓒ 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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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11월 30일), 제굴은 천 원에 세 개 하는 가지를 샀다. 집에 오자마자 손을 꼼꼼하게 씻고 가지를 반쪽으로 잘라서 속을 파냈다. 파낸 가지 속은 따로 다졌다. 거기에 미리 만들어 둔 토마토소스를 넣고, 토마토를 썰어서 볶았다. 그것들을 다시 속을 파낸 가지에 넣고는 생모차렐라 치즈를 얇게 썰어서 올렸다. 그리고 오븐에 구웠다. 

"제굴아, 미안. 진짜 맛있는데 한 개만 먹을게. 엄마가 낮에 리소토를 먹어서 그런가? 속이 불편해. 잘 놔뒀다가 내일 먹어도 되지?"

제굴은 동생 꽃차남이 먹다 남긴 고구마로 경단을 만들었다. 재밌어 보인다고 꽃차남이 끼어들어서 부엌은 난장판이 되었다고.
 제굴은 동생 꽃차남이 먹다 남긴 고구마로 경단을 만들었다. 재밌어 보인다고 꽃차남이 끼어들어서 부엌은 난장판이 되었다고.
ⓒ 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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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12월 1일), 제굴은 동생이 먹다 남긴 고구마를 으깼다. 고구마 경단을 바삭하게 만들고 싶어서 콘플레이크와 견과류도 으깼다. 서너 개만 만들려고 했는데 꽃차남이 "형형, 나도 할래"라고 끼어들었다. 만든 경단은 한 접시뿐인데 부엌은 난장판이 됐다. 제굴은 밥상을 차리기 전에 청소기를 밀었다. 일 마친 내게 아이들은 어서 먹어보라고 재촉했다.

"진짜 미안해. 엄마가 지금 경단은 못 먹을 것 같아. 그냥 밥만 먹을게."

수요일(12월 2일), 남편이 학교와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을 직접 데려왔다. 그는 오자마자 채소를 씻고, 고기를 볶고, 샐러드를 만들었다. 부엌을 혼자 차지하고 음식 하는 걸 좋아하는 제굴은 아빠가 있으면 제 방으로 들어간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 마음이 바쁜 남편은 신속하게 음식만 하고 나갔다. 그때야 제굴은 방에서 나와 밥상을 차렸다.

푸성귀가 많은 밥상,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그러나 나는 속이 답답해서 잘 먹을 수가 없었다.
 푸성귀가 많은 밥상,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그러나 나는 속이 답답해서 잘 먹을 수가 없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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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성귀가 많은 식단, 딱 내 스타일. 그러나 잘 먹지 못 하겠다. 제굴은 "왜요?" 하는 눈으로 나를 봤다. 나는 "이따가 9시부터 금식해야 해. 내일 아침에 간 검사랑 위 내시경 하거든"이라고 했다. 꽃차남은 "엄마, 그때처럼 병원에서 몇 밤 자고 오는 거야?"라고 물었다. 이모네 집에 자기를 맡겨주라면서 "만화 봐야지"라고 즐거워했다.    

작년 이맘때, 나는 속이 불편했다. 음식을 먹으면 목구멍에 걸리는 듯 했다. 뭔가가 가슴께를 짓누르는 것도 같았다. 골치까지 아팠다. 위 수면내시경을 했더니 만성위염. 한두 달 정도 처방해준 약을 먹었다. 마시지 말라는 커피도 멀리했다. 얼마 못 가 본색이 나왔다. 커피를 마시고, 먹는 게 귀찮다고 끼니도 걸렀다. 다시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팠다. 

위 내시경 조직 검사, 비관적인 생각이 앞서고

목요일(12월 3일), 나는 위 내시경을 받았다. 매끄러워야 할 위는 울퉁불퉁. 이상하게 생긴 것도 있어서 두 개를 떼어내 조직검사 해 보기로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담담한 척 들었지만 힘이 풀렸다. 꽃차남 임신했을 때는 진료만 하러 갔는데 바로 입원해서 두 달간 병원에서 지낸 적 있다. C형 간염 치료 중에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 와서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

"그냥 짜증이 나. 큰 병은 아니겠지. 그래도 계속 병원 다니면서 돈 바치고, 시간 들일 일 생각하면 진이 빠진다고. 너도 알지? 조직 검사만 하고 끝난 적이 없잖아. 왼쪽 가슴에서 섬유선종인가 빼내는 수술 하고, 빈혈 원인 찾는다고 위 내시경이랑 장 내시경까지 하고는 결국, 자궁근종 때문에 출혈 있다고 수술 하고. 이게 끝나지를 않는다고."

나는 병원에서 오자마자 동생 지현에게 하소연을 했다. 지현은 재깍 우리 집으로 와서는 "자매(지현이 나를 부르는 호칭)가 아프면, 이 집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아?"라고 물었다. 쓰레기를 버릴 사람이 없게 된다고, 형부 팬티하고 제굴이 팬티하고 구분할 사람이 없게 된다고, 그런 중요한 노릇을 하는 사람이 나라고 일깨워줬다. 맞다. 화장실 청소도 내가 한다.

금식한 지 15시간 만에 지현이 끓여준 죽을 먹었다. 비관적인 생각이 좀 가셨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은 나쁜 습관도 좋은 거라고 했다. 몸이 아프면, 나쁜 습관만 고치면 되니까. 그런 것도 하나 없는데 병들면 죽는 거라고. 일단, 나는 커피에 우우를 부어서 한 잔 마시고 밥벌이를 했다.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오는 1주일 뒤부터는 좋은 습관을 유지할 거니까. 

학교에서 돌아온 제굴은 냄비에 남은 죽을 보았다. '엄마 아파서 죽 먹어야하나 보다'생각하고는 죽을 끓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제굴은 냄비에 남은 죽을 보았다. '엄마 아파서 죽 먹어야하나 보다'생각하고는 죽을 끓였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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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갔다 온 제굴은 손을 씻고는 부엌으로 갔다. 냄비에는 죽이 남아 있었다. 제굴은 '엄마는 아파서 죽 먹어야 되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지난 봄, 요리학원 잠깐 다닐 때 배운 죽 레시피를 떠올려봤다. 쌀을 30분간 불린다. 불린 쌀 반절은 환자들의 소화를 돕기 위해서 절구에다가 으깬다. 쇠고기를 한식 양념으로 잰다.

"간장, 설탕, 참기름, 깨, 소금, 다진 파, 마늘로 만드는 게 한식 양념이에요. 양념한 쇠고기를 냄비에 볶다가 불린 쌀을 같이 넣어서 농도를 맞춰. 쌀이 너무 많으면 질은 밥이 되니까 물을 조절해요. 마지막에 국 간장으로 색깔 내고요. 근데 나는 시간이 없어서 쌀을 안 불리고 아빠가 예약취사 해 놓은 밥이 있어서 그걸로 끓였어요."

꽃차남은 밥상을 보고 "이런 죽 싫어. 흑임자죽만 좋아"라고 했다. 제굴은 "너 좋아하는 새우 요리 했잖아. 두부 김치도 있고"라고 했다. 일곱 살, 모든 게 마음에 안 드는 유아 사춘기인 꽃차남은 계속 반찬 투정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어쩌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을 제굴은 고요했다. 그러니 형제간의 국지전은 불발됐다.

"제굴아, 잘 먹었어. 고마워. 근데 왜 너네도 죽 먹었어? 싫어하잖아."
"엄마 혼자만 먹으면 그렇잖아. (울컥) 쓸쓸하잖아요."
"오호, 엄마가 저번처럼 주사 많이 맞아서 머리카락 빠지면 어쩔래? 머리도 깎을 기세다."
"그건 아니고요. 머릿발이 얼마나 중요한데."

진정한 자립은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할 때

제굴은 꽃차남에게 "오늘만큼은 엄마 힘들게 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그 말을 귓등으로 들은 꽃차남은 만들기 해야 하는데 투명 테이프 떨어졌다고 뒹굴고 울었다. 제굴은 눈비 오는데 문구점에 갔다. 공책에 온갖 캐릭터와 무기 아이템을 그려놓고는 꽃차남에게 장착해 주었다. 대평화! 만족한 꽃차남은 안방으로 가서 놀고, 제굴과 나만 거실에 남았다.

나는 <소년이여, 요리하라!>를 읽으면서 낄낄거렸다. 요리를 해본 적 없는 전계수씨는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 그곳에서 난생 처음 김치를 담근다. 맛있다. 그 뒤로 물김치, 된장찌개, 감자조림, 김밥, 잡채, 해물탕 등을 한다. 급기야는 룸메이트 친구들의 부모님까지 초대해서 한국 음식을 차려 파티를 연다. 이미 책을 읽은 제굴은 내게 말했다.

"나는 '고기는 항상 옳다' 챕터가 재밌었어요. '먹으면서 이거 보면 꿀잼일 걸?'에 나온 초창기 '심슨 가족'도 보고 싶고요. 엄마는 책에 나온 요리 중에서 미역국만 해 봤죠?"
"아니지. 볶음밥도 해 줬잖아. (웃음) 네가 유치원 다닐 때라 생각 안 나겠지만."
"나는 책에 나온 요리 이미 다 해 봤어요. 그것도 여러 번씩."

저녁밥상. 꽃차남이 만든 고구마 경단이 올라와 있다.
 저녁밥상. 꽃차남이 만든 고구마 경단이 올라와 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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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제굴은 야자 대신 저녁밥을 하겠다고 부엌에 들어섰다. 그 순간에 바로 엄마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소년이여, 요리하라!>에서 노명우씨는 '진정한 자립은 나를 위한 요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했다. 책의 부제목은 '자립 지수 만렙을 위한 소년 맞춤 레시피'. 그렇다면, 제굴은 이미 어른이 되고도 남았다. 

내 눈에 제굴은 아직도 '품 안의 자식'. 샤워 짧게 해라, 스마트폰 그만 봐라, 책 좀 읽어라, 일찍 자라... 같은 잔소리가 끝도 없이 나온다. 열 살 차이 나는 동생이랑 싸우는 꼴을 볼 때마다 내 울화통이 터진다. 그러나 제굴은 저녁마다 식구들 밥을 차리고, 아침에는 혼자 일어나서 밥 먹고 학교에 간다. 식구라고 해도, 때로는 냉정한 평가를 하는 '어른'이다.

"아빠는 대학생이었을 때부터 멋있었네요. 엄마 자취방에 중고 냉장고 샀을 때 김치 담가줬다면서요?"
"응. 근데 음식 잘 해야만 멋있는 거냐? 엄마한테는 뭐 그런 격찬 없어?"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의 멋짐이 있겠지요. (웃음) 내가 아직 몰라서 문제지만요."

꽃차남은 어느새 제 형아 옆으로 왔다. 주먹이나 고성이 오가지 않는 형제를 보는 건 '백만 년'만의 일. 나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찍어서 동생 지현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저녁으로 먹은 죽 사진도 보내면서 "쪼까 아픈 것도 좋아"라고 했다. 지현은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조카들이 엄마랑 같이 죽을 먹었다고 칭찬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자매는 먹을 복이 장난 아니야. 1970년대도 아닌데 고등학생 아들한테 죽을 받아 먹네이!"

'백만 년' 만에 한 번 올까말까한 형제간의 무격투,  무고성의 시간. 대평화!
 '백만 년' 만에 한 번 올까말까한 형제간의 무격투, 무고성의 시간. 대평화!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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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위 내시경, #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소년이여, 요리하라!, #만성 위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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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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