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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빚 갚아주는 나라'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같은 제목의 기사를 많이 뜬다.
 '개인 빚 갚아주는 나라'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같은 제목의 기사를 많이 뜬다.
ⓒ 인터넷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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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금융위원회에서 금융채무 연체자의 특성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금융위는 현재 금융채무 불이행자로 등록된 112만 명을 비롯해, 금융채무 연체 취약계층 수를 350만 명으로 추산했다. 쉽게 말해 빚으로 고통을 겪거나 아예 채무 상환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 약 350만 명이라는 말이다. 이는 여러 기관의 정보를 이용해 분석한 채무자 전수조사 결과다.

금융위는 이 중 상환능력이 매우 부족한 채무자가 114만 명에 이른다고 결론냈다. 금융위원장이 직접 분석 결과를 발표하며 "114만 명에 대해서는 파산 제도를 통해 남은 채무를 정리하고 복지 정책으로 생활 안정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정부는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에 눈치를 보며 채무 조정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와 비교하면 이번 금융위의 발표는 진일보한 모습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 빌려주고 쥐어 짜는 나라

금융위 발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언론사마다 도배됐다. '개인 빚 갚아주는 나라'라는 동일한 제목의 기사가 여러 언론에 등장했다. 이틀에 걸쳐 같은 제목의 기사가 생산됐는데, 검색을 하면 40개가 넘는다. 과연 우연일까?

언론의 이런 기사 '도배질'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금융권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동하지 않았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금융권은 정부의 파산 면책 확대 정책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파산 면책에 대한 금융권의 불편한 심정은 언뜻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금융권의 이런 거부감은 무책임한 대출영업에 대한 제동 자체를 거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빚은 어떤 경우에도 갚아야 한다' '빚을 갚지 못하면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은 무시될 수 있다'는 논리로 무책임하고 약탁적인 대출 세일즈를 계속 하겠다는 것이다.

채무자가 상환 능력이 없으면? 금융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쥐어 짤 수 있다. 채무자의 가족에게서 뜯어낼 수도 있고 불법 사채를 통해서라도 갚게 만들 수 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월 소득 150만 원의 4인 가구 가장에게 4000여만 원의 돈을 빌려주는 배짱영업을 가능케 한다.

자활센터 근로를 전제로 정부에게 기초생활수급비를 받는 가장에게도 금융권은 카드를 발급하고 대출을 해준다. 이런 일은, 저소득층에게 대출의 문턱을 낮춘 '금융복지'처럼 선전되기도 했다. 틈만 나면 '금융의 문턱을 낮추라' '금융소외가 문제다' 등의 논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는 진보진영도 예외가 아니다.

소득을 늘어나게 하거나 양질의 일자리를 어떻게 공급할까를 고민하는 대신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전제로 돈을 빌려주는 일이 복지로 이해되다니.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도 은행 문턱을 낮춰 저소득 서민에게 저금리 대출 상품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금리가 아무리 낮아도 저소득 서민에게는 원금 상환 자체가 만만치 않다.

가뜩이나 소득이 적어 적자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금리가 낮든 높든 돈을 빌려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갚으란 말인가? 심지어 세금으로 생계비를 보존받는 사람에게 대출 영업을 허용하는 현실이다. 많은 이들이 '세금으로 빚 깎아준다'고 아우성 치는데, 그럼 세금으로 금융권 빚 갚아 주는 건 정당한가? '개인의 생계를 위해 돈 빌려주라'는 주문이 터무니 없을뿐 아니라 잔인한 일일 수 있다는 우려는 이 땅에서 거의 전무하다. 돈 빌리는 것을 마치 특권 혹은 기회로 여기는 한국사회 '금융 무지'에서 온 비극이다.

2011년 8월, 시민들이 서울역 인근의 한 대부업체 앞을 지나는 모습.
 2011년 8월, 시민들이 서울역 인근의 한 대부업체 앞을 지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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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소득이 150만 원인 수급자 가장에게 카드사와 저축은행, 캐피탈과 대부업체 10여 곳이 4000여만 원을 빌려주기도 했다. 과연 갚을 수 있을까? 당연히 못 갚는다. 그럼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돈을 빌려준 금융권을 탓하기보다 "능력도 안 되면서 왜 돈을 빌려? 미쳤구만!"이라며 채무자만 나무란다.

돈 빌려준 금융업체 책임은 정말 없을까?

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 놓였다면 사람은 합리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늘 돈에 쫒기는데 카드사에서는 카드론 한도를 준다. 심지어 케이블 TV에서는 영화 한 편 상영하면서 2~3편의 대출 광고를 내보낸다. 빚 권하는 정도를 넘어 대출을 적극 세일즈하는 사회 현실. 늘 돈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갚은 계획을 꼼꼼이 따지고 빚을 거절하는 행동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돈을 빌리는 일은, '미친 짓'이 아니라 절박한 현실의 문제다. 책임을 묻겠다면, 갚을 능력을 꼼꼼이 따질 수 있는 신용정보까지 쥐고 있는 금융사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분별하게 돈을 빌려줬는지 따져야 한다.

저소득 서민을 위한 복지 사업이라도 계획하고 무분별하게 돈을 빌려 줬을까? 복지 사업이었다면 저소득 채무자가 빚 갚을 여건이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인간적인 채무 상환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야만적이다. 채권 추심을 위해 채무자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것 쯤은 일도 아니다. 오죽하면 금융위에서 채권 추심을 위한 독촉 전화를 하루 세 통으로 제한하는 가이드 라인을 발표했을까. 채무 불이행 취약 계층에는 당연히 다중 채무자가 많다. 한 금융사가 하루 세 번 추심 전화를 해도, 개인에 따라서는 10통, 30통의 전화를 받을 수 있다. 이쯤되면 일상 생활을 거의 포기해야 한다. 

이 추심 가이드 라인도 기존보다 진전된 것이니, 연체자의 일상은 한국사회에서 채권자의 노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본권을 침해하는 추심에도 그 불법성을 채무자가 입증해야 한다.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는 채무자가 빚 독촉의 불법성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 당연히 불법 채권 추심은 가려내기 어렵다. 처벌도 쉽지 않다. 추심원들 대부분이 추심회사가 위임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개인 사업자 신분이다.

추심원들은 매일 실적에 쫓기고, 실적이 없으면 소득이 한 푼도 없다. 당연히 기본급도 없다. 불법 추심의 유혹에서 자유롭기 어렵고, 추심회사는 개인 사업자의 불법 추심을 책임지지 않는다. 개인의 문제이니 처벌이 어려운 게 당연하다.

이렇게 채무자를 쥐어 짤 수 있으니, 상환 능력이 안 되는 사람에게 인심 쓰듯이 무책임하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세금으로 생계비 지원받는 사람에게 빚 갚으라고?

이 모든 일은 파산 면책이 어렵기 때문에 발생한다. 파산 면책을 받으려면 수십 가지 서류를 준비해야 하고 관련 비용도 부담해야 한다. 그나마도 절차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변호사도 선임해야 한다. 돈이 없어 파산 신청을 하는데 수백만 원의 돈이 든다. 파산 이후 면책이 되리란 보장도 없다. 이러니 빚 독촉에 쫓겨 자살 같은 극단을 선택하거나 고금리 대출로 빚을 돌려막는 일이 발생한다.

도덕적 해이는 채무자에게 발생하는 게 아니다. '개인 빚 갚아주는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사실상 파산 면책은 갚아주는 것도 아니다- 세금으로 생계비를 지원받는 사람에게조차 빚을 권하고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사회가 문제다. 

금융위의 이번 연구 분석 결과 114만 명은 쥐어짜도 빚 갚을 능력을 없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에게 파산 면책의 기회와 복지를 지원하는 일은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국가의 책임이다.

정부 세금으로 이들의 빚을 갚아준다는 인상을 줘, 파산 면책 제도의 문턱을 유지하려는 게 금융권의 검은 속내인 듯하다.

신중히 살피지 않고 무책임하게 대출을 해줬다면 금융사들이 손해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도 투자자 아닌가. 채무자의 정보 상당량을 쥐고 투자한 후 실패했으면 오히려 야단을 맞아야 한다. 채무자들의 도덕성을 탓하는 건 뻔뻔한 태도다.

가난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금융이 아니다. 복지와 일자리가 중요하다. 금융과 복지를 혼동하는 문화부터 바꿔야 한다. 금융의 문턱은 절대 낮아선 안 된다. 그 문턱은 파산 면책의 활성화, 즉 잘못 빌려주면 떼일 수 있다는 교훈에서부터 시작한다.


태그:#금융위, #파산 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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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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