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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에 부착된 대출 관련 광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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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활 수급자 00씨는 우편물을 열어보기가 두렵다고 한다. 00신용정보회사로부터 날아오는 독촉 서류 때문이다. 최근에는 '임대보증금 압류 예정'이라는 통지서를 받고 이틀간 잠을 설쳤다. 임대보증금마저 빼앗기고 나면 길거리에 나앉게 될 것이란 공포감 때문이다. 20여 년 전 자녀의 사업자금을 도와주기 위해 생긴 빚이다. 형편이 넉넉한 부모가 되지 못한 탓으로 빚으로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자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상환이 불가능해지고 장기간 연체상태가 되었다.

최근 고금리가 지속되고 경기가 악화되면서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린 채무자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 저축은행의 연체율이 6%를 넘어섰고 은행권은 물론이거니와 전 금융업권의 연체율이 계속 상승하고 있다. 연체율이 상승하는 것은 그만큼 빚을 갚기 어려운 한계 상황의 채무자들이 늘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채무 취약계층의 고통은 연체와 동시에 이어지는 빚독촉이 원인이다. 채무자들의 평범한 일상을 위협하는 수준의 빚독촉은 불법추심에 해당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발생한 채권추심 관련민원은 2861건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23.9% 늘었다.

정부는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불법사금융 민생현장 간담회'에서 민생을 약탈하는 불법 사금융 처단, 불법 이익 박탈 등을 지시한 바 있다. 이후 금감원은 대부업체에 대한 특별점검 계획을 발표했다. 불법 사금융 및 부당 채권추심을 근절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금감원의 민생현장 특별점검 계획은 올 12월부터 내년 1월까지 4개반을 동원해 대부업체 10여 곳을 점검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금감원의 두 달에 걸친 특별점검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현재 대부업체는 등록된 업체만 8600여 곳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 중 대출 규모가 1000억 원대 이상인 대부업체만 21군데이고, 자본금이 100억 원 이상으로 금융위에 등록한 대부업체 수도 1400여 군데에 달한다. 이 중 10여 곳을 선정해 두 달간 현장 점검을 한다는 것인데, 0.001%의 현장 점검 계획이 도출된 과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금감원은 '현장점검을 통해 채무자의 평온한 일상을 침해하는 과도한 독촉행위, 채권추심 가이드라인 위반 여부 등을 살펴보겠다'라고 강조한다.

불법 근절을 위한 화려한 계획은 금감원장을 위한 이벤트?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은행연합회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제1회 보이스피싱 우수 지킴이' 시상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은행연합회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제1회 보이스피싱 우수 지킴이' 시상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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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은 윤석열 정부 들어서서 이전 정부 때와는 달리 위상이 크게 강화된 듯하다. 검사 출신의 원장이 임명된 뒤, 금융위원회의 금융정책 결정마저도 금감원이 주도하는 분위기가 종종 연출된다. 심지어 언론에서는 금융위는 거의 보이지 않는 반면 금감원장이 금융정책의 수장처럼 등장할 때가 많다.

민생현장 점검 또한 이전 정부에서는 감독업무를 금감원이 실제 진행하더라도 현장 점검에 관한 계획 및 세부 사항 등은 금융위의 정책결정을 통해 이뤄졌다. 언론 보도 또한 금융위원장에 의해 진행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검사 출신의 기관장은 정부 조직의 모든 위계를 뛰어넘어 민감한 금융사건들과 금융정책들에 대해 슈퍼스타처럼 종횡무진하고 있다.

이러한 금융당국의 '셀럽' 행보에 걸맞게, 금감원이 두 달에 걸쳐 현장점검을 한다는 등의 대단한 계획을 발표한 것이 놀랍지는 않다. 다만 그 내용이 겨우 0.001%의 대부업체를 향하고 있으며, 현미경으로 보려하는 것인지 두 달에 걸쳐 진행하겠다는 것이 황당할 따름이다.

금감원의 특별점검 계획이 황당한 것은 이뿐 아니다. 당초 금감원의 현장점검이 불법 사금융 및 부당 채권추심을 근절하기 위한 것이라면 점검 대상 자체가 적절해야 한다.

우선 불법 사금융에 대한 점검 계획이라면 경찰과 합동으로 무등록 대부업체들을 조사해야 한다. 금감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에 신고된 불법 사금융 피해 건수는 6784건이다. 최근 5년 새 가장 많은 양이다. 피해는 주로 무등록 불법 대부업체를 통한 것으로, 법정금리인 연이율 20%를 넘는 고금리 부과, 불법 채권추심, 불법 광고, 불법 수수료, 유사수신행위 등이다.

등록 대부업체라고 해서 불법 행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등록 대부업체를 통한 불법 행위는 매우 심각하다. 수백~수천%에 이르는 살인적인 고금리로 이자를 강탈하거나, 연체할 경우 성착취 추심을 하는 등 채무자의 삶을 파괴하는 악질적인 범죄행위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따라서 불법 사금융 피해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무등록 대부업체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 및 검경과의 협조를 통한 적극적인 수사가 절실하다.

부당 채권 추심을 근절하기 위한 현장점검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불법 부당 추심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부업체보다는 신용정보 회사를 점검해야 한다. 대부분의 금융회사들과 심지어 대형 대부업체들 상당수가 임직원을 통해 직접 추심하기보다는 신용정보 회사에 채권 추심을 위탁하고 있다.

현재 신용정보 회사는 24군데로, 소속된 위임직 채권 추심인만 8000여 명이다. 이들이 대부분의 금융회사와 대형 대부업체들로부터 위탁을 받고 추심을 대행한다. 문제는 위임직 채권 추심인의 처우가 신용정보 회사의 정규직 직원이 아닌 특수 고용직 형태이며, 실적에 따라 추심인의 수입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수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추심은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채무자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 상환을 독촉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한다. 그러나 금감원은 부당 채권 추심을 근절하겠다고 하면서 실제 추심행위가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신용정보 회사는 점검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거창한 계획을 요란하게 발표는 했으나, 정작 불법행위가 벌어지는 사건 현장이 아닌 곳에서 열일을 계획중인 셈이다.

추심회사의 압류 통지서, 불법입니다

신용정보사의 추심인으로부터 임대보증금을 압류하겠다는 통지를 받은 사례자의 고통은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채권의 공정한 추심에 관한 법률 제 8조는 변호인이 아닌 추심인의 소송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더욱이 신용정보회사는 채권자가 아니라 추심행위만 위탁받은 곳이다. 따라서 신용정보회사의 소속 변호사 또한 소송행위를 할 수 없다. 압류 예고 통지서 자체가 불법이다.

금감원이 신용정보회사들의 추심 행위에 대해 단속 몇차례만 진행해도 간단히 근절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불법 추심이 신용정보 회사를 통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추심회사에 대한 단속 사례는 드물다. 채무자들을 공포로 내모는 불법 추심에 대해 쉽게 근절할 수 있는 방안을 두고, 두 달간 0.001%의 대부업체만 들여다 보겠다는 금감원의 이벤트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태그:#불법추심, #연체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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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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