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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 해 6월은 꽤나 더웠다. 실제로 그 때 기온이 얼마나 올라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6월치고는 가장 더운 해였음이 분명하다.

물론 중학생 주제에 거리를 휩쓸던 민주항쟁의 열기를 느끼고 더웠다고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 6월이 더웠던 것은 교실 창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아니었지만 제법 30도 가까이도 올라가던 열기는, 대학가와는 꽤 멀리 떨어진 우리 학교 교실까지 매캐하던 최루가스 때문에 꼭꼭 닫아걸어야 했던 창문 속에서 요동을 쳐댔다.

더구나 한 녀석만 책상을 조금 느슨하게 잡아 빼면 한 줄이 다 부대낄 지경으로 예순 명 가까이 빼곡하던 그 교실에서 벽에 달린 고물 선풍기 두 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후끈하고 끈끈한 공기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몰아대는 것뿐이었다.

5월부터도 이따금 매운 연기가 날아 왔지만, 6월 들어서고 나서는 거의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아침마다 어머니는, “손수건 하나씩은 가지고 다니는 법이다. 어디 가다 눈물 콧물 쏟으면 어쩔거냐”며 손수건을 챙겨 주셨다.

창문을 닫아 걸어봤자 오전부터 불어온 매운 바람에 어느새 눈과 코가 빨개지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차라리 찜통 신세를 감수할 만큼 바깥 공기는 독하게 매웠다. 그 지루한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쉬는 시간이었다.

한 녀석이 정말 좋은 생각이 났다며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청소용 고무 양동이에 찬 물을 가득 담아들고 왔다. 그리고 낄낄거리며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더니, 거기에 발을 담그는 것이었다. 발을 씻으려는 모양이었다.

“야, 발을 씻으려면 화장실에서 씻으면 되지 왜 여기까지 들고 오냐?”
“발은 누가 씻어?”
“그럼 뭐 하려고?”
“발 담가놓고 있으려고 그러지.”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당연하지.”

하기야 60명 빼곡히 들어찬 교실에서 뒷자리 녀석이 발을 어디에 담그든 올리든 앞 교탁에서 보일 리는 없었다. 더구나 그 후끈한 교실에서 선생님이 돌아다니며 수업할 리도 없었다. 다만 ‘너 앞으로 나와’하는 호령만 떨어지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을 듯도 했다.

“야, 그래도 선생님이 뭐 문제라도 풀라고 시키거나 그러면 어떡할래?”
“아, 걱정마. 걸려두 내가 걸려. 그냥 어려운 척하면서 얼른 양말 신으면 되지 뭘.”

사실 내가 그 녀석한테 그렇게 치밀하게 따져 물은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덥고 답답할 때 발 두 개만 시원한 물에 담가두어도 세상이 열 배는 신선해 보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비록 화장실 청소도구함인 까닭에 어딘가 추레하고 지저분한 고무 양동이었지만 못견디게 청명한 또 다른 세상처럼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결국 그 양동이에 발을 담그지 못했다. 우선 키가 작은 편이라 자리가 앞쪽이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한계인 데다가, 나는 그 친구처럼 담이 크지 못했다. 그 친구는 걸릴 확률이 절반에만 못 미친다면 학생주임 구두 뒷축도 썰어놓곤 했지만 나는 십분의 일의 우려에도 떨려서 지각날 담장을 넘지 못하고 정문에서 자청해 매질을 당하곤 했다. 아무래도 내가 발을 담그는 그 시간에 선생님은 나에게 뭔가 심부름이라도 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꽤 며칠 이어진 그 친구의 무사한 실내피서기간에 나는 하루하루 더 올라가는 기온과 더 독해지는 공기에 지쳐가고 있었다. 더구나 그 양동이가 눈에 들어온 다음부터 나의 두 발바닥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후끈거렸다.

나의 이 모든 더위를 한방에 날려준 사건은 6월 29일보다 조금 앞서 일어났다. 아마 수학 아니면 한문 시간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아무말 없었고, 아이들은 그저 각자 뭔가를 공책과 연습장에 끄적거리고 있었던 기억만 난다.

어쨌거나 역시 매캐하고 후덥지근하고 무료했던 그 시간, 갑자기 뒤쪽에서 ‘벌컥’하는 소리가 나더니 뭔가가 무너지듯이 ‘우아악’하는 비명이 퍼져나갔다.

“야, 뭐야, 뭐야.”

호기심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눈보다는 발뒷꿈치가 사태를 먼저 알아채기 시작했다. 물이었다. 교실 안에 흥건한 물이었다.

친구가 발을 담그고 있던 양동이가 엎질러진 것이다. 욕심껏 담아두었던 물이 쏟아지면서 교실바닥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던 다른 아이들의 신발주머니며 미술 준비물 따위를 순식간에 덮쳐버린 것이다. 입에는 바닥의 물만큼이나 흥건한 침에 범벅이 된 채 놀라 일어선 그 녀석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천연덕스럽게 교실 안에서 양동이물에 발을 담그는 배짱의 그 녀석에게 지루한 수업시간에 잠시 눈을 붙이는 것쯤이야 별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항상 같은 자세로 담가놓은 다리 모양이 조금 물리기도 하고 축축하기도 했던 모양인데, 그렇더라도 두 다리를 모두 양동이 턱에다가 올려놓는 것은 심한 만용이었던 것이다. 곱지도 않던 잠버릇 끝에 뒤척였는지, 다리가 미끄러졌는지 어느 순간 양동이는 엎질러졌고 일은 벌어져 버렸다.

물론 그 녀석은 적지 않은 몽둥이 찜질을 당했고, 학생부실로 불려가서 진술서인지 반성문이지, 어쨌든 그런 피곤한 문서를 몇 장 써야 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따금 선생님들이 교실을 한 바퀴씩 돌면서 감시하는 통에 다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6·29 선언이라는 것이 나왔다. 어느 찻집 주인은 찻값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학교 근처 어느 맥주집도 문 앞에 맥주 박스를 쌓아놓고는 특별히 반값 세일을 한다고 써 붙여 놓았다.

데모꾼들 때문에 곧 세상이 망할 듯이 걱정하던 TV들은 금세 표정을 바꾸어 이제야 새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고 늘어놓고 있었다. 더는 최루가스도 날아오지 않았고 창문도 활짝활짝 열어 제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7월로 들어서는 무렵이었지만, 뽀얗다 못해 노랗던 최루가스가 걷힌 하늘과 거리는 마치 가을을 맞은 듯이 청명하고 경쾌했다. 그것이 6월 항쟁의 승리였다. 싸움이 어디에서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중학생에게까지 미치는 승리의 기쁨이었다.

세상이 갈수록 더워지는지, 짜증이 늘어 그러는지 올해는 창문을 열어도 시원치가 않다. 바람도 밋밋하고, 최루탄도 터지지 않은 공기가 눈이나 목에서 따끔거린다. 신문이라도 읽다보면,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이 막막한 것이 속에서 막혀 진땀만 흐르곤 한다.

차라리 날이 더운 것은 쉽다. 그런데 속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어찌 달래볼 방법이 없다. 방바닥에 양동이라도 한 번 엎어보아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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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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