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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있을 때, 서울대 공대 출신의 신병이 전입온 적이 있었다. 사실 최전방 소초에서 서울대 공대 출신의 병사를 만나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병역특례로 군대에 오지 않고 병역을 마칠 방법도 있을 뿐 아니라, 일단 입대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학력이라면 사단과 연대를 거치는 도중 어디선가 차출해 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무지 요령도 없고 운도 없었을 그 스물 아홉 살짜리 서울 공대 대학원생은 최전방 부대의 소총수로 배치된 것이다. 그래서 ‘유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를 종종 고참들은 ‘박복’이라고 불렀다.

전방 소총부대에서 서울대 졸업생이 남들보다 유용하게 쓰일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머리가 두드러지는 것은 가끔 휴가 나갔다 돌아온 사람이 가져온 신문 쪼가리 속의 퍼즐을 풀 때가 유일했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고참들의 입에서 그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새겨졌다.

“박복아, 서울대 나왔으면 이 정도는 간단히 처리할 수 있겠지?”
“서울대 나왔다고 내가 우습게 보이냐? 그래, 나 전문대밖에 못나왔다. 꼽냐?”
“서울대 나온 놈이 왜 이렇게 어리버리해?”

일을 시킬 때도, 질책을 할 때도, 푸념을 할 때도 빠지지 않는 것은 서울대였다. 그 친구가 자신이 서울대 출신임을 괴로워했던 것은 아마 그 평생에 그 때가 유일했으리라.

그렇지만 박복이가 들어오는 날부터 내무실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더 이상 우울증에 걸려 자살이냐 탈영이냐를 고민하는 신병들도 없어졌고, 뒤꼍에서 주먹다짐을 벌이거나 하는 고참들도 사라졌다. ‘10분간 휴식’ 시간에도 도대체 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푸념 대신, 역시 서울대도 별수없더라는 낄낄거림에 담배연기도 가볍게 날았다.

원래 남의 불행만큼 내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없는 법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도 살아갈 길 막막한 살벌한 경제위기와 취업대란의 시대에 26개월을 썩고 있는 초조감을 달래주는 데는 ‘서울대 나와봤자 별수없구나’하는 것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최전방에 배치된 서울대 출신 사병.

숱한 장담에도 불구하고 병역을 피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한, 그러고도 미국에서 ‘조국이 그립다’거나, ‘조국이 받아준다면 돌아가고 싶다’는 둥 생뚱맞은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유승준이 ‘공공의 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의 국적 포기를 또는 거짓말을 또는 병역기피 자체를 문제 삼기도 하지만 어쨌건 그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렇지만 어느 대목에 가면 또 신기한 생각이 든다. 도대체 이 젊은이 하나에 우리가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말이다.

이따금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리는 미국 대입시험의 한국계 만점자나 골프·피겨스케이팅·수영·아이스하키·미식축구 같은 생소한 스포츠계의 한국계 천재 소년소녀들이 과연 어느 나라 국적자였던가?

또 우리가 ‘공인의 거짓말’에 그렇게 철저한 사람들은 분명 아니지 않았던가? 당장 민정 이양 공약을 뒤집은 박정희 소장과 전두환 준장에서부터 중간평가 약속을 뒤집은 노태우, 쌀시장 수호 약속을 뒤집은 김영삼 그리고 정계은퇴 약속을 번복한 김대중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거짓말 하는 공인’의 대표자들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살지 않았나?

그뿐인가? 연예인들이 표절이나 섹스비디오나 음주운전이나 다이어트 파동이나 무엇이든 민망한 일 한 가지만 당하면 은퇴를 선언했다가 분위기 좀 잠잠해질 무렵 아침 프로 토크쇼에서의 심경고백을 거쳐 컴백무대를 가지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유승준의 거짓말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병역기피 자체는 더더욱 유별난 허물이 되지 못한다. 주지하다시피 심각한 디스크 때문에 병역 면제를 받은 댄스가수의 서커스 동작 같은 춤에 열광하고, 정신질환으로 면제받은 록가수를 선거운동원으로 삼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거친 자료들을 통하면 연예인 중 병역 면제율은 절반이 넘어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유승준에게 분노하는 걸까? 어찌 생각하면 그저 얄팍한 처세가 한심스런 나약한 젊은이 하나에 불과한 그에게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것일까?

공인의 거짓말에 익숙하면서도 유승준의 거짓말에 집착하는 이유

병역비리와 관련한 시론에 항상 등장하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라는 말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제국이 1000년을 지탱한 힘으로 지목한 이 말은, ‘귀족(노블리스)’과 ‘책임(오블리제)’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사회지도층이 솔선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서는 사회를 이끌 수 있는 도덕적인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어쩌면 너무 노골적으로 한국 지배층의 고민이 담긴 듯한 바로 이 말 속에 유승준 문제에 관한 해답이 들어있다.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지배층의 병역비리는 우리 사회의 절차적 합리성에 대한 마지막 믿음마저 무너뜨려 지배층에 관한 걷잡을 수 없는 불신을 가져온다. 한국 법무부가 유승준을 ‘국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칠 염려가 있거나, 경제질서·사회질서 또는 선량한 풍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사람’이라는 과분한 말까지 갖다 붙이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가 돈과 힘이 있다면 언제라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이 병역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증명해보임으로써, 열등함을 각기 자신의 부족함으로, 불운함으로, 팔자로 돌려온 대다수 ‘평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때문이다.

사실 집안에서 돈이나 인맥으로 조금만 도와주면 그리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는 것이 우리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골프든 승마든 바이올린이든 이것저것 시켜보다 보면 뭔가 특출난 재주를 발견하거나, 만들 수 있다. 또 조금 신경 써서 학교 보내고, 학원 보내고 과외선생 붙여주면 대학 가는데 훨씬 유리할 뿐 아니라 혹시 대학 가는데 실패했다면 유학을 보내서 학벌을 화려하게 꾸밀 수도 있다. 한두 다리만 훑어가며 도움을 받으면 취업도 어렵지 않다. 하다못해 무슨 실수를 해서 파출소에 끌려가더라도 있는 집 자식과 없는 집 자식이 다르다.

그런데 상위 10%의 부동산 점유비가 90%에 달하는 우리 사회에서 90%의 사람들은 제 집 하나 건사하기 빠듯한 형편을 벗어날 수 없고,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은커녕 제자리를 유지하기도 힘들다. 대입시험과 입사시험과 기타 등등의 선발과 선별 과정에서 번번이 패배하며 열등감을 키워가는 이들은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골프나 쇼트트랙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선수들을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환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 ‘있는 집 자식들’과의 출발선의 차이점을 실감하며 위축된다.

그런데 내세울 것 없이 몸뚱아리로 세상과 맞서는 이들이 특권층을 마주하며 끌어들이는 거의 유일한 위안은 바로 ‘군대’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곱고 귀하게 자라서, 세상 두려운 것 없이 활개 치며 사는 ‘있는 집 자식들’을 보면서 억누를 수 없는 부러움과 열등감을 달래주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빼고는 그 녀석이 군대에 가서 흙탕물과 비굴함과 체력의 한계 속에서 뒹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유일하다.

있는 집 자식인 건 기본이고, 드물게도 춤 실력과 라이브 능력에다가 울뚝불뚝한 근육과 꽃미남의 얼굴까지, 그리고 활달한 성격과 유머감각까지 갖춘 유승준. 같은 남자로서도 그를 바라보며 열등감을 억누르고 부담 없이 선망과 부러움을 쏟아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공공연한 병역 발언 때문이었다. 그만은 그 수많은 병역면제 터프가이들과 달리 나와 똑같이 군생활을 할 테니 굳이 눈꼴 시리게 볼 이유는 없겠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부유해도 군 생활은 같이 할 거라는 믿음을 깨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말이 있다. 조련사가 원숭이에게 먹이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마고 했더니 마구 화를 내기에, 다시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마고 했더니 좋아하더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병역의 평등이 사회의 평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병역 하나만 평등하면 다른 모든 불평등은 참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재산과 기업과 재단과 교회가 불공정한 방법으로 세습되고, 그 과정에서 수백, 수천억원이 탈세되는 현실에 우리는 지나치게 둔감하다. 그리고 복지와 교육과 문화와 정보의 기회가 불공정하게 배분되고 있다는 사실에도 너무나 무관심하다. 어쩌면 조삼모사의 고사 속 원숭이보다도, 유인용으로 던진 고깃덩이에 정신 팔려 도둑에게 꼬리치는 경비견에 가까운 모양새다.

유승준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그의 한심한 언행도 아니고, 국가와 민족과 국방에 대한 저마다의 숭고한 의지와 사명감도 아니다. 불평등한 우리 사회에서 평등의 증거로 통용되어온 한 가지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지배층의 위기감이며, 동시에 논리적 항의의 길을 잃고 엉뚱한 구석에서 튀어나온 그 온갖 불평등에 대한 피지배층의 본능적 불만과 분노의 목소리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불평등에 대한 불만에 논리를 부여하는 것인가, 아니면 병역의 평등 너머에 가려져있던 사회적 불평등을 우리가 나서서 다시 가려주는 것인가.

유승준이 정말 나쁜 사람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과 병역의무 자체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 중에 어느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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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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