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이 부족한 사람, 쌀쌀맞고 나약한 인상을 지닌 사람, 화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 대중연설을 할 때 논리가 아닌 '에너지'로 설득력을 얻은 사람, 정치연설인데도 종교적 동일시 즉 "아멘!"을 이끌어내곤 했던 사람, "독일이여 일어나라"는 단순한 문구로 대중을 자극한 사람, 대중이 동조할 만한 불쾌한 이미지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던 사람, 그 사람의 '커리어'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히틀러: 파시즘의 진화>(아래, 히틀러)다.
 
히틀러와 나치즘을 다룬 영화 및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제법 많다. 그 가운데 비교적 초기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히틀러>가 지닌 독특한 점을 꼽으라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자료사진과 기록영상만으로 구성된 작품이라는 점이다. 2시간 10분 동안 거친 질감의 흑백 자료사진&기록영상들이 흘러나온다(컬러는 잠깐 동안 나옴). 재연 드라마도, 전문가 인터뷰도 없다. 그런데, 거의 매 장면에서 히틀러가 보이고 그의 육성이 들려오는 탓일까, 긴장감이 높게 유지된다. 이 작품을 위하여 유럽 각국이 소장하고 있던 모든 자료사진&기록영상들이 총동원된 것 같다. 실제로 엔딩 크레디트 화면에 유럽의 여러 나라 이름들이 나란히, 그리고 오랫동안 열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는, '전체주의에 대한 경계'라는 주제의식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전체주의이론의 주요논거로서 히틀러의 정체성(identity)을 언급한 한나 아렌트의 명저 <전체주의의 기원>과, 히틀러의 심리상태를 파헤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저서 <파괴란 무엇인가>의 주제의식에 이어진다. 예컨대 '위대한 인물'의 이미지는커녕 중심이 텅 비어있어 마치 '양파 같은 히틀러'를 논의한 <전체주의의 기원>의 논지가 <히틀러>에서 확인된다. 아울러, 파괴를 사랑하고 죽음을 욕망하는 인물로 히틀러를 소름끼치도록 차근차근 입증해나가는 <파괴란 무엇인가>의 심리학이 <히틀러>의 저변에 깔려있다. 
 
영화 포스터    <히틀러: 파시즘의 진화>

▲ 영화 포스터 <히틀러: 파시즘의 진화> ⓒ 넷플릭스

 
리더십 없음
 

다큐멘터리 <히틀러>에 따르면, 청년 히틀러가 군인이었을 때 그의 상관은 히틀러에게 리더십이 없음을 간파했다. 그는 깡마른 몸집에 핼쑥한 얼굴, 어딘가 모르게 나약한 인상을 풍기는 청년이었다. 그 나약한 이미지를 지워보고자 나치당에서 권력을 장악해갈 당시 히틀러는 채찍을 지참하고 다녔다. 실제로 히틀러는 공적으로 드러내 보여지는 이미지 관리를 꽤 중시했다. 집권 초기, 히틀러의 전속사진가가 히틀러를 '만인의 연인'으로 연출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꽤 주효했다. 히틀러가 다니는 곳에는 꽃이 뿌려졌다. "꽃길만 걸으세요, 오빠"라는 의미로.
 
이는 기록영상에서도 자주 확인되는데 여성들이 히틀러 주변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들과의 성적 긴장감을 유지하고자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독신주의자를 표방했다. 그의 연인 에바 브라운은 극비사항이었다. 히틀러는 성적 흥분과 집단 히스테리를 교활하게 활용했다. 유럽의 젊은 여성들은 '강한 남자' 히틀러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경쟁했으며, '유력한 연설가' 히틀러의 손을 스치기만 해도 감격했다.
 
스크린샷 <히틀러: 파시즘의 진화>

▲ 스크린샷 <히틀러: 파시즘의 진화> ⓒ 넷플릭스

  
그런데 정작 유력한 연설가 히틀러의 연설에는 논리가 없었다. 히틀러는 논리가 아니라 에너지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히틀러는 연단에 오르면 곧바로 연설을 시작하지 않고, 마치 머뭇거리듯 주저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중 사이에 궁금증과 긴장감이 적당히 높아지면 히틀러는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연설에는 언제나 대중의 환심을 살 만한 이미지가 열거됐다. 그는 특별히 대중의 열등의식, 분노를 효과적으로 자극했다.
 
히틀러는 구체적 근거나 대안 제시도 없이 "독일이여 일어나라"라는 단순한 문구로 대중을 자극했다. 그러자 제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1929년 경제대공황의 여파를 겪으며 인생이 쉽지 않아, 진정 "일어나"고 싶었던 대중(겁먹은 중산층과 노동자들, 실업자들)이 히틀러 주변에 벌떼처럼 다가왔다. 그들은 히틀러가 말을 잠시 쉴 때마다 동의했는데, 때로는 절대적 신의 계시에 화답하듯 무려 "아멘!"을 합창하기까지 했다.
 
리더십도 없고 논리도 없었으나, 강한 에너지만큼은 확실히 내뿜었던 히틀러의 감정적 에너지에 온 독일이 전염되었을 때 히틀러는 독일 수상이 되었다. 그런데, 리더십 없는 히틀러는 수상이 되자마자 눈에 띄게 둔해졌고 나태해졌으며 무감각해졌다. 그는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유람하듯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군중들을 만났고, 휴식할 때는 별장에서 늘어져 쉬었다. 집무실 책상은 사용된 적이 없었고, 정부각료 회의실은 매일같이 비어있었다.
 
파괴를 미화함
 
평소에 히틀러는 예의바르고 정중하며 자제력이 있는 남자였다. 정신분석가&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파괴란 무엇인가>에서 히틀러를 "멀쩡한 정신의 소유자"로 설명하였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악인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는 단순한 가정은 커다란 위험을 가져온다. 즉 악인이 파괴활동을 시작하기 전엔 악인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다."
 
히틀러가 파괴활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한 후에도 몇 년간은 히틀러가 독일인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의 수치를 지워준 사람'으로 홍보되었다. 다수의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열광했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진짜로 자신이 위대한 사람인 줄로 착각했다. 사실인즉 히틀러는 인생이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못 되었고, 건축가가 되고 싶었으나 못 되었고, 쿠데타를 계획하고 실천했으나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가짜 자신감이 그를 휘감았다.
 
히틀러의 얼굴 히틀러의 눈빛은 매우 차갑다. (기자가 직접 그린 그림)

▲ 히틀러의 얼굴 히틀러의 눈빛은 매우 차갑다. (기자가 직접 그린 그림) ⓒ 이인미

 
전쟁의 초기엔 독일이 승승장구해서 히틀러의 가짜 자신감은 덩달아 부풀어올랐다. 그러나 영국,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며 독일의 군사력은 점차 약해져갔다. 그때쯤부터 히틀러는 이전보다 더 쌀쌀맞아지고 더 조용해졌다. 그는 독일의 패전 소식을 들어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으며, 망상에 빠져들어 가짜 자신감을 유지했다.

그는 공식활동을 줄여나갔다. 독특하게도 '죽음'만이 그를 공개적 장소로 끌어낼 수 있었다. 전사자들 장례식에는 히틀러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 무렵 히틀러는 "죽음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45년, 독일의 패배가 확실해졌을 때에도 히틀러는 항복하지 않았다. 그는 "이길 수 없다면 세상의 절반을 심연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히틀러는 지하벙커 안에서 연인(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후 동반자살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전체주의에 대한 오해가 뜻밖에도 좀 있는 것 같다. 맥락 없이 히틀러를 운운하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본회퍼를 거명하는 등, 팩트체크조차 결여된 의견들이 가끔 나타나 혼란을 더한다. 그래서, 진심으로 히틀러 같은 전체주의적 리더의 출현을 경고하고, 테러 가득한 전체주의의 도래를 예방하고 싶다면, 풍부한 자료사진&기록영상에다 전체주의이론과 히틀러의 심리분석까지 적절히 가미한 이 작품 <히틀러>를 우선 관람하길 권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히틀러 파시즘의 진화 HITLER A CAREER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수업], [해나(한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커뮤니케이션북스, 2020)], [박원순의 죽음과 시민의 침묵], [(2022세종도서) 환경살림 80가지] 출간작가 - She calls herself as a ‘public intellectual(지식소매상).’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