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

한국야구의 걸출한 재목들이 가장 많이 태어난 해로 1973년이 꼽힌다. 그 해에 태어난 선수들 중 염종석, 정민철, 안병원 등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프로에 데뷔한 것이 1992년이었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던 73년생의 핵심멤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무대에 나타난 것은 1996년이었다.

하지만 정작 1996년 박찬호와 조성민이 미국과 일본으로 떠나고, 역시 일본 진출을 원했던 임선동이 자신을 1차 지명의 사슬로 엮은 LG와 기나긴 법정싸움을 벌이느라 야구장 밖을 떠돌면서 소문보다는 먹을 것 없는 잔치가 될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 투수로는 차명주와 이정길이 각기 5억과 4억의 계약금을 받으며 '반사이익'을 챙기기도 했지만, 각기 2승과 0승으로 주저앉으며 놀림감이 되고 말았다. 

그 해 야수로서 주목받은 '92학번'들은 박재홍과 김종국, 그리고 홍원기였다. 그 중 박재홍이 4억대, 김종국과 홍원기가 2억대의 몸값과 그만큼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프로 데뷔 공식경기인 시범경기 개막전에 선두타자로 나선 첫 타석에서 초구 홈런을 날리며 '또 한 명의 이종범'으로 이름을 알린 해태의 김종국과 시범경기 8할 타율을 기록한 한화의 홍원기였다.

반면 박재홍은 파워와 스피드 어느 면에서도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고, '고비용 저효율'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다.

대졸 92학번의 대표주자, 박재홍

30-30 개척자, 박재홍 30-30은 홈런과 도루 양 부문에서 모두 최고수준임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20-20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가치를 가지고 있다.

▲ 30-30 개척자, 박재홍 30-30은 홈런과 도루 양 부문에서 모두 최고수준임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20-20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가치를 가지고 있다. ⓒ 현대 유니콘스

92학번의 '빅3'니, '빅4'니 하던 선수들이 이래저래 모두 빠져나가 버렸던 그해 박재홍은 실질적으로 투수와 야수를 통틀어 대졸 신인 중 최대어라고 할 수 있었다. 고교시절에는 시속 140킬로미터 이상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고,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파워와 스피드와 수비력을 겸비한 견실한 내야수였기에, 어느 면으로든 쓸모를 찾을 수 있는 선수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그런 가치를 잘 알고 있었던 박재홍은 오직 고향 팀이라는 명분과 1차지명이라는 못마땅한 무기의 힘을 빌려 헐값에 자신의 발목을 잡으려는 프로팀의 의도에 순순히 끌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박재홍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자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계약조건을 제시받아, 지명을 거부하고 실업팀인 현대 피닉스와 계약을 했다. 그렇게 굴러들어온 복덩이를 잡은 현대는 아직 입단하지도 않은 그에게 최상덕과의 트레이드를 통해 새로 창단한 프로팀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히는 수완을 발휘했다.

하지만 피곤한 우여곡절 속에 박재홍은 겨울 전지훈련조차 참가하지 못했고, 그것은 더구나 기나긴 정규시즌이 요구하는 체력관리의 노하우를 가지지 못한 신인 선수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진단이었다. 

현대 유니콘스의 창단감독 김재박이 박재홍에게 맡긴 임무는 공격의 첨병이었다. 3루수 자리에는 이미 거구의 3할 타자로 성장한 권준헌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김인호와 김성갑이 주고 받았지만 누구도 2할대 중반조차 넘기지 못했던 1번타자 자리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피드와 주루 감각만큼은 아마와 프로의 격차가 크지 않은 영역이었고, 아직 다듬어지거나 검증되지 못한 단신의 박재홍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박재홍은 외야수로 전향했고, 1번 타자로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몇 가지 예상하지 못한 점들이 드러나면서 1번 자리를 내놓게 되는데, 우선 너무 공격적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박재홍은 선두타자로 나서면서도 투수가 더 많은 공을 던지게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뻔히 볼이라는 걸 알면서도 작정을 했다는 듯 초구부터 풀스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삼진 수가 볼넷의 두 배를 넘길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는 신중하게 파헤쳐가며 실마리를 잡으려던 김재박 감독을 허탈하게 했고, 작전이라는 걸 써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몹쓸 1번 타자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결격사항은, 지나치게 장타력이 좋았다는 점이었다. 박재홍은 개막하자마자 안타의 절반 가까이를 장타로 연결했고, 3경기에 하나 꼴로 홈런을 날려대며 4번 타자 김경기마저 제치고 홈런랭킹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0경기쯤 소화한 뒤로는 아예 홈런 단독선두로 질주하기 시작했고, 김재박 감독은 '자동 원아웃'으로 경기를 시작하게 만드는 선두타자의 공백을 감수하고라도 그를 3번 타순으로 옮겨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번으로 타순을 옮긴 뒤, 탐색과 출루라는 부담감마저 벗어버린 박재홍은 미친 듯이 휘두르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68%. 높지 않은 도루 성공률이었지만 출루만 하면 무모하리만큼 달려대는 그는 확실히 상대 배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걸 넘어 질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결대로 친다'는 개념을 아예 모르는 듯, 어떤 구종 어떤 구질의 공이든 자신의 방망이로 새로운 궤적을 입력해 펜스 너머로 직격해버리는 무지막지한 타격을 선보이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 타자'라는 느낌으로 투수들을 주눅들게 하곤 했다.

7월 16일, 박재홍은 한화와의 청주 원정경기에서 3회 초 이상목을 상대로 3점 홈런을 빼앗아내며 20-20을 완성했다. 신인으로서는 두 해 전 김재현에 이어 두 번째, 통산으로는 8번째였고, 그 여덟 번 중 가장 적은 경기 만에 기록한 것이기도 했다.

지나친 장타력, 1번에서 3번으로 '좌천'되다

물론 내내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동계훈련조차 소화하지 못한 채 치르는 프로 첫 시즌의 체력적 부담은 날씨가 더워지면서 성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장종훈의 41홈런 기록을 깨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던 페이스는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8월 들어서는 그와 함께 팀의 분위기도 눅눅하게 처지기 시작했다. '부정타격자세시비'도 부채질을 했다.

다른 타자들과는 정반대로 타석 맨 앞쪽에 서서 타격하던 그의 왼발은 종종 방망이를 휘두르며 타석 밖의 공간을 밟았다. 그것을 당시 쌍방울의 김성근 감독이 처음 지적했고 곧 이어 해태의 김응룡 감독도 가세했다.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규칙에는 '타자가 한 발 또는 양 발을 완전히 타자석 밖에 두고 타격을 했을 경우 아웃 처리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리고 박재홍의 경우 분명히 배트가 공을 때리는 순간 한 발을 타자석 밖에 두곤 했다. 

하지만 KBO는 '타격을 하기 전에 타석을 벗어나면 아웃처리하며, 타격을 하는 과정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심판이 고의성 여부를 판단해서 처리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리고 그 뒤로 박재홍에게 부정타격 아웃을 선언한 심판은 없었고, 그렇게 한 고비는 넘겨졌다.

또 다른 고비는 고향 광주 팬들의 원망이었다. 이미 고교시절부터 그의 재능을 아끼고 기다려왔던 광주 팬들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고 특히 박재홍이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첫 시즌부터 프로야구무대를 쥐고 흔드는 것을 보면서 배신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5월 10일, 첫 광주 원정경기에 중견수로 나섰던 박재홍은 7회 말 수비 때 해태 이순철의 중전안타 타구를 잡다가 관중석에서 날아온 물병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고, 결국 더그아웃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광주 관중석에서는 종종 그에게 십 원짜리 동전이 날아들었고, 고향의 팬들에게 받는 따가운 시선과 야유는 부정타격 시비보다도 훨씬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

원조 팔방미인, 김성한  이만수와 더불어 1980년대 최강의 타자였던 김성한. 그는 첫 타점왕에 올랐던 1982년 팀의 유일한 10승투수이기도 했다.

▲ 원조 팔방미인, 김성한 이만수와 더불어 1980년대 최강의 타자였던 김성한. 그는 첫 타점왕에 올랐던 1982년 팀의 유일한 10승투수이기도 했다. ⓒ 해태 타이거즈


고향의 관중석에서 날아든 십 원짜리 동전

하지만 처음 달리는 프로무대 정규리그에서 최악의 구간을 지날 무렵에 만난 꿀맛 같은 올스타전 휴식기간을 거친 뒤 그는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8월 말, 조금씩 타격감을 회복하기 시작한 데 이어 9월 3일, LG와의 잠실 원정경기에서 그는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고 만다.

3회 초 1사 1,3루. 선발로 전향해 다시 LG 마운드를 이끌던 김용수가 그 무렵 자타가 공인하던 박재홍의 약점인 몸 쪽 낮은 코스로 떨어뜨리려던 포크볼이 높은 곳으로 밋밋하게 밀려 들어왔고, 그런 횡재를 놓칠 리 없던 박재홍의 배트가 둔탁하게 밀어낸 공은 왼쪽 담장을 훌쩍 넘어 스탠드에 박혔다. 시즌 30호 홈런. 그리고 이미 8월 25일에 달성해두었던 32도루와 함께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30-30'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사실 홈런을 잘 치는 선수가 도루도 잘 하는 것은 70년대까지 우리 야구사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에이스 겸 4번 타자'도 없지 않은 마당에 홈런과 도루를 겸비한다는 건 사실 큰 화제도 아니었다. 장효조, 김일권, 김봉연 같은 선수들이 모두 대학과 실업 무대에서 도루왕과 홈런왕을 두루 섭렵했고 김재박 같은 경우에는 도루왕과 홈런왕은 물론이고 국가대표팀에서 투수로까지 활약한 인물이기도 했다.

프로가 출범한 뒤로도 처음 30홈런과 '20-20'을 달성했던 김성한이 한때 10승 투수로도 활약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고 재일교포선수들을 통한 문화충격을 겪으며 빠르게 진화하고 성장한 한국야구는 곧 전문화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잘 던지면서 잘 치는 선수는 김성한 이후로 곧장 씨가 말랐고, 강하면서 빠르기도 한 타자 역시 김성한을 제외하곤 각자 한 쪽을 택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만수와 장채근이 홈런타자를 상징하고 이순철과 전준호가 도루왕을 상징하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김성한으로부터 이호성, 장종훈, 이정훈, 송구홍, 이순철, 김재현으로 이어졌던 '20-20' 역시 '호타준족'으로 불리긴 했지만 20개씩의 홈런과 도루로는 어느 쪽에서도 '최고'로 이름을 내밀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박재홍의 30-30, 아니 30홈런 36도루는 의미가 달랐다. 그것은 당장 홈런왕을 차지하는 동시에 도루 부문에서도 치열한 선두경쟁을 벌인 끝에 4위에 오른 '최고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두 해 전 입단한 이종범, 그리고 한 해 뒤에 입단하는 이병규와 더불어 '완성형'이라 부를 수 있는 선수들의 탄생이었고, 한국야구가 또 한 번 질적 성장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완성형 선수의 출현, 한국야구의 또 한 단계 성장

1996년 한국프로야구는 언제나 처럼 8개 팀이 피터지게 싸운 끝에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유례없이 강력한 두 개의 돌풍이 지배한 해이기도 했는데, 하나는 김성근 감독의 마술로 정규시즌 2위까지 돌격했던 만년 꼴찌팀 쌍방울 레이더스였고, 다른 하나는 '만년 꼴찌에서 이등 팀' 태평양을 인수해 창단 첫 해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현대 유니콘스였다.

특히 LG감독 시절 펜스를 앞으로 당겨 'X존'을 설치하기도 했던 장본인이지만, 그해 김재박 감독은 인천 도원야구장의 펜스를 낮추며 타격에 승부를 걸었고, 박재홍은 그 최대의 수혜자였다. 박재홍은 그해 인천에서만 18개의 홈런을 날렸고 30개의 홈런을 28명의 투수에게서 골고루 빼앗아내는 '무차별성'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가 질주하고 김경기가 20개로 뒤를 받치며 전통의 물방망이 인천팀이 사상 처음으로 팀 홈런 1위를 기록하는 대포군단으로 거듭났고, 그렇게 두 해 만에 다시 한국시리즈에 나서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초보감독 김재박과 초보선수 박재홍이 이끌었던 현대호의 돌풍은 또 하나의 돌풍 쌍방울과 플레이오프 5차전 혈전을 치르며 함께 잦아들고 말았다.

1997년에는 이종범이, 그리고 1999년에는 이병규와 홍현우와 데이비스가 30-30클럽 회원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박재홍이 가지는 위상은 각별하다. '최초'일 뿐만 아니라 1996년에 이어 1998년과 2000년에도 30-30을 성공시키며 '최다'의 주인공이며, '유일한 다수 성공'을 통해 시즌의 특수성과 가장 관련이 적은 사례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30-30 기록이 작성된 지 10년이 넘고 있다. 그리고 박재홍도 벌써 나이 마흔을 코앞에 둔 노병이 됐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방망이와 다리가 모두 녹슬어버린 박재홍이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아직도 '호타준족'이라는 별명이 외쳐지는 것이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1996년을 목격한 이들에게 그의 이름은 아직도 상식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한다. 사람을 상대하며 기록과 싸우고 기억과 맞서며 추억과 마주하는 것이 프로야구라서 그렇다. 

예컨대, 그해 돌풍의 주역 김성근 감독과 박재홍이 한 팀을 이룬 SK와 그 돌풍을 차례로 잠재운 이종범과 이대진의 팀 KIA. 예컨대 2009년 7차전 승부를 지켜보며 1996년의 회상에 잠겨볼 수 있는 것은 말 많고 탈 많았던 야구장에서 길게 버텨온 올드팬들의 몇 안 되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종범의 눈물 박재홍, 이병규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 이후 '완성형 선수들의 시대'를 이끌었던 이종범.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순간 그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가 가슴 속 어느만큼까지 스며드느냐를 가지고 야구팬의 '구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종범의 눈물 박재홍, 이병규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 이후 '완성형 선수들의 시대'를 이끌었던 이종범.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순간 그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가 가슴 속 어느만큼까지 스며드느냐를 가지고 야구팬의 '구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 기아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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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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