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로 향하는 건 꼭 바다를 사랑해서만은 아니다. 그러나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한가운데서 마침 그 자리의 중력만은 견딜 수 없다는 듯 그 힘에 순응해 곧장 강으로 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강을 사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누군가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가 등으로 강에 뛰어들었다면 추측은 확신이 된다. 영화 <쑤저우 강(苏州河, Suzhou River>(2000년)에서 16세 소녀가 이런 모양으로 강에 뛰어든다.
중국의 로예(婁燁) 감독이 젊은 날에 창작한 이 로맨스 영화에서, 투신을 사랑과 등가로 파악해야 하는지가 완전히 석연하지는 않다. 넉넉하게 사랑의 모색이라고 해두자. 목숨을 걸었는데 겨우 사랑의 모색이라고? 어쩌면 사랑은 목숨보다 상위의 개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건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을 회피한다.
반대로 사랑이란 확신이 없어도, 아마 그 그림자만으로, 아마 그 모색만으로 목숨을 거는 게 가능한 사람이 있다. 누구에게나 해당하진 않겠지만, 그게 가능한 나이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혹은 어쩌면 그것이 가능한 '나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가능한 '사람'만 있다는 게 정확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것이 원래 어느 방향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그림자를 길고 또 짙게 드리우기 마련이어서 그림자에 뛰어들지 않고 사랑에 다가가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할 때 사랑의 모색 없이 능히 사랑을 껴안는 게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림자를 흘겨보는 사람은 발을 들이미는 척하다가 뺄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은 정작 본체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반대로 본체로 직진하는, 드믄 유형의 사람이라면 그림자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미 밟고 서 있다. 그림자가 맹독성이라면 이미 죽음의 문턱을 밟은 셈이다. "죽도록 사랑해"라고 말하긴 쉽다. 그저 말해진 그 말은, 말 그대로의 사랑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쑤저우강>은 "죽도록 사랑해"가 말에 그치지 않는 특별한 캐릭터를 영상에 담았다.
두 개의 사랑 두 개의 서사
<슈저우 강>은 사랑에 관한 두 개의 평행 서사를 보여준다. 하나가 주요 서사이고, 나머지가 그 서사를 수식하기에 평행이 아니라는 관점도 가능하다. 사랑을 서사라고 표현한 게 살짝 외람되나 두 서사가 결합해 특이하고 힘 있는 스토리를 관객에게 전한다. '1+1=2'가 아니라 '2'를 많이 넘어서는 스토리이다. 막상 찬찬히 들여다보면 서사 하나하나는 특이할 게 없다. 젊은 패기를 앞세운 로예 감독의 독특한 시선과 두 서사의 결합 방식이 그런 느낌을 영화에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게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