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를 들라면 몇 손가락 안에 꼭 꼽히는 <이터널 선샤인>. 이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무엇이 특별해서 많은 영화팬과 비평가가 <이터널 선샤인>을 사랑의 정수를 담은 영화라고 입을 모을까.
공통으로 거론하는 단어는 기억이다. 기억을 통한 사랑의 독창적인 탐구쯤으로 의견이 모인다. '독창적'이란 단서가 있긴 하지만, 사랑과 기억 사이에 절대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데에 이견이 있을 수 없기에 단지 '기억'이 이 영화의 핵심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랑과 기억
애덤 샌들러와 드루 배리모어가 주연하고 피터 시걸이 연출한 <첫 키스만 50번째>는 <이터널 선샤인>과 같은 해인 2004년에 개봉했다. 원제는 < 50 First Dates >. '첫 키스'와 '첫 데이트'가 같은 의미가 아니지만 맥락은 통한다.
<이터널 선샤인>만큼이나 <첫 키스만 50번째>의 스토리도 널리 알려졌다. 두 영화 모두 기억이 소재이다. 플레이보이인 헨리(샌들러)가 우연히 만난 루시(배리모어)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 작업이 성공적이어서 사랑이 시작하는가 싶었더니, 웬걸 다음 날 아침에 루시는 헨리를 못 알아본다.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루시의 기억이 아침마다 10월 13일 일요일 교통사고 당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즉 헨리와 만남을 포함해 그날 이후 기억이 축적되지 않는다. 매일이 자신과의 첫 만남인 루시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헨리는 매번 기상천외한 작업을 시도하며 하루하루를 달달한 첫 데이트로 꾸려나간다. 리셋을 피하고자 사랑을 기록한 비디오테이프를 만들어 아침에 기상한 루시가 볼 수 있게 하는 궁여지책으로 사랑을 이어간다.
<첫 키스만 50번째>는 확실히 로맨틱 코미디이다. <이터널 선샤인>을 로맨틱 코미디로 못 볼 것은 아니지만, 코미디언 짐 캐리가 남자 주인공임에도 코미디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우화의 형식으로 제법 진지하게 사랑의 본질을 성찰했기 때문이다. 우화가 웃길 순 있지만 코미디는 아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이 연출한 <이터널 선샤인>에서 짐 캐리가 소심한 남자 조엘 배리시, 케이트 윈슬렛이 행동파 여자 클레멘타인으로 나와 연인 사이를 연기한다. 영화는 2004년 밸런타인 데이에서 시작한다. 조엘은 출근하려다가 말고 회사를 땡땡이치고 무단히 뉴욕주 롱아일랜드 동쪽 끝 몬토크(Montauk)로 가는 기차에 올라탄다. 2월이라서 엄청 추운 몬토크의 해변에서 파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활달한 성격의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잠에서 깬 헨리의 얼굴로 영화를 시작해 17분 가량 남녀의 첫 만남이 전개되고 나서야 타이틀 시퀀스가 등장한다. 이때는 헨리가 운전하며 울고 있다. 실연한 남자의 모습이다. 흐름상 첫 만남 뒤에 헤어짐을 배치한 듯하다. 어떤 관객은 흐름이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 법하다. 영화가 진행되며 관객은 시간 순서가 뒤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즉 만나고 헤어진 게 아니라, 헤어지고 나서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어떻게 2004년 밸런타인데이에 몬토크에서 첫 만남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 <첫 키스만 50번째>의 루시처럼 이번엔 한 명이 아니라 주인공 두 명이 동시에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일까. 이제 우화가 본격화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