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구역의 미친X는 나야." 미국 유명 드라마 <가십걸>에 나오는 대사이자 한국 작품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문장. 바다 건너 인용될 만큼 유명해진 건 자신을 '미친 여자'라 공표하는 여성이 주는 흥미로운 탓 아닐까. 상류층 고등학생들이 지지고 볶는 <가십걸>을 다 본 사람이라면 이 문장이 주는 교훈을 알 것이다. 한 구역에 '미친 여자'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미친 여자가 너무 많이 나온다. 살인을 즐기는 여성 살해범, 살인 현장만 보면 흥분하는 여자 경찰, 끔찍한 일을 겪고 미쳐버린 여자까지. 나사 여러 개 빠진 듯한 캐릭터들 사이에도 표준적인 여성은 있었다. 번듯한 직업에 화목한 가정을 이뤘고, 아이까지 임신했다. 이 평범한 여성이 유일하게 살인마를 휘어잡는 인물이라니. 도대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임산부가 보여준 '진짜 광기'
▲ 살인마 '상아'와 대립하는 '의선' ⓒ NETFLIX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깊은 숲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전영하(김윤석)'와 정체 모를 살인마 '유성아(고민시)'가 만나며 서로를 파고드는 스릴러다. 마치 안갯속에서 드라마를 보듯 과거와 현재가 말없이 교차하고, 여러 인물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연출은 시청자마저 헷갈리게 한다. "중간 회차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관람평이 많은 이유다.
또한 압도적인 광기로 다른 캐릭터를 짓눌러야 하는 '성아'가 생각보다 심심하다. 맹목적인 충동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인맥에 기대 자신이 그린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재산에 기대어 사람을 죽여놓고도 일급 변호사를 선임하는 '평범한' 금수저였다. 캐릭터 설정이 이렇다 보니 주변 인물들이 성아에게 맥없이 끌려다니는 건 미친 여자의 광기라기보단 금수저의 난동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흥미를 이끈 건 성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전의선(노윤서)'였다. 등장 장면부터 의선이 얼마나 평범하고 무해한 인물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약사이자 임산부이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버지 '영하'의 펜션에 놀러올 만큼 화목한 가정을 만들었다. 성아의 광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펜션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의선이다. 의선의 손에 이끌려 펜션에 입성한 성아는 영하와 치열한 영역 싸움을 벌이며 사람들을 죽이고, 펜션을 장악하려 한다.
그런 성아를 제압하는 건 영하도, 경찰도, 성아의 아버지도 아닌 의선이다. 연락두절이 된 아버지를 찾아 펜션으로 향한 의선은 성아와 단둘이 만나게 된다. "딸X 전화도 안 받냐"는 성아의 비아냥에 표정이 바뀐 의선은 "너희 아버지와 나는 살인 공범"이란 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되레 "흥미롭다"고 비웃으며 "나 약사인데 너 약 먹어. 정신과 소개해 줘?"라고 받아친다.
대화에서 밀린 성아는 결국 힘으로 의선을 제압하려 나선다. 극 중에서 성아의 완력은 술수와 합쳐져 다른 남성 캐릭터들을 제압할 정도로 강하다. 게다가 의선은 임신한 상태. 그러나 성아의 생각을 읽듯 의선은 완벽하게 그를 제압했다. 막판에 반칙 같은 성아의 행동만 아니었어도 의선의 완벽한 승리였던 장면이다.
지금까지 미디어에 등장한 임산부 캐릭터가 온화하고 상냥한 이미지였다면, 의선은 평범하면서도 살인마와 대적할 만큼 강한 캐릭터로 빚어졌다. 색다른 캐릭터 활용법에 해당 장면은 SNS를 통해 퍼지며 시청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임산부 캐릭터가 이렇게 활용되는 건 처음이다", "살인마보다 강한 게 임산부라니", "성아가 '가짜 광기'라면 의선은 '진짜 광기'다" 등 호평이 이어졌다.
'비속어'를 남발하는 임산부
▲ 초음파 속 태아를 보자마자 비속어를 뱉는 <애나 만들기> 속 '비비안' ⓒ NETFLIX
의선처럼 평범하지 않은 임산부 캐릭터는 넷플릭스 <애나 만들기>에 또 있다. 해당 작품엔 독일 출신 상속녀처럼 위장해 뉴욕 상류층을 속인 '애나'와 그를 추적하는 기자 '비비안'이 등장한다. 비비안은 재기를 꿈꾸는 기자이자 보는 사람마다 당황하게 만드는 출산 임박의 만삭 임산부다.
극 중 비비안이 임산부답게 안정을 취하고 평화로운 순간은 드물다. 대부분 사기꾼 애나와 신경전을 벌이거나 그의 변호사를 찾아가 증거를 달라고 협박하는 등 괴성을 지르거나 거짓말하기에 바쁘다. 또한 비비안은 썩 출산이 반갑지 않다. 여성의학과에 방문해 초음파로 꿈틀거리는 태아를 만난 남편은 환희에 차지만, 그는 아니다.
비비안은 비속어를 내뱉으며 태아가 아닌 자신의 커리어를 걱정한다. "아이를 낳는 기쁨이 커리어의 상실과 신체의 이상을 보상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을 질식시켜 버릴 것"이라며 노골적인 표현으로 임신에 얽힌 복잡한 속내를 표출한다.
일에 미쳐 사는 비비안은 아기방을 증거 수집용 보드로 탈바꿈하고, 바닥에 몇 번이고 주저앉아 소리를 지를지언정 취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주변 인물도 비비안의 욕심을 존중하며 그가 임산부로서 겪는 신체적 고통과 기자로서 겪는 정신적 고통 사이에서 마음껏 배회하게 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속 의선과 <애나 만들기> 속 비비안의 공통점은 결코 그들이 평화로운 임산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거나 위험한 인물을 만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발산한다. 그들은 사회와 미디어가 약속한 '평안한 임산부'라는 틀을 깨고 한 사람이자 여성으로 시청자에게 걸어온다.
여성의 몸은 개인적이지 않다. 임산부라면 더욱 그렇다. 태아의 건강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두며 그들을 향해 근거 없는 훈계를 던지거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안정'만 취하라고 강권한다. 그런 세상을 제쳐두고 자신의 삶에 뛰어든 캐릭터들이 수세기 동안 임산부를 옭아맨 사슬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