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그의 죽음을 모티프로 한 영화가 나올 줄 알았다. 10.26 사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수행 비서로서 대통령 시해의 공범이라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박흥주 대령 말이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신군부에 맞서 직속상관인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려다 순직한 김오랑 중령의 사례와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진다. 지난 14일, 영화 <행복의 나라>가 개봉했다.

기실 그를 알게 된 건 꽤 오래전이다. 20년 가까이 5.18민주화운동을 중심으로 한 현대사 강의와 사적지 답사 인솔을 해오다 보니, 유신정권과 신군부 집권 기간의 세세한 역사까지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됐다. 특히 일각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의 주범인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박흥주라는 이름도 동시에 오르내렸다.

그즈음 사형 집행 전 어린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의 내용을 접하게 됐고, 그에게서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참군인이자 당당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면모를 봤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자녀들에게 아빠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라며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독립적인 인간이 될 것을 주문했다. 군인으로서의 모습과 아버지로서의 그것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게 느껴졌다.

특히 그의 유언이 교사인 내게 교육자적 소명을 일깨우는 죽비와도 같은 일갈도 담겨 있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당시 자신의 선택에 일말의 후회도 없다는 뜻일 테지만,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선택이며, 자신의 판단에 따라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적었다. 이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지녀야 할 덕목이자 우리 교육의 고갱이다.

과문한 탓인지, 박흥주 대령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는 처음인 듯싶다. 주인공은커녕 조연으로도 등장한 경우조차 없었던 것으로 안다. 김재규라는 이름조차 함부로 꺼낼 수 없었던 지난 수십 년 동안 그의 이름은 차라리 드러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엄혹한 군사독재정권 시절 숨죽여 산 가족들처럼 그의 이름 역시 시나브로 잊히고 지워졌다.

자막이 올라간 뒤 관람객들은 이구동성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서울의 봄>에 이어진 후속작인 것만 같다고. 감독과 출연 배우만 다를 뿐, 내용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작품에 담긴 문제의식도 일맥상통하다는 거다. 나날이 사회가 뒷걸음질 치고,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행태가 반복되는 현실에서 시의적절한 영화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전작 <서울의 봄>을 통해 하나회 소속 정치군인들의 타락상과 대조되어 충직한 참군인의 모습을 보여준 이들을 우리는 알게 됐다. 비록 엑스트라나 카메오에 불과한 조연 중의 조연이었지만, 영화에서 보여준 순간의 강렬함은 주연 못지않았다. 김오랑 중령과 국방부 초병으로 근무하다 신군부의 총에 맞아 산화한 정선엽 병장 등은 그렇게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됐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생각나는 인물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영화 <행복의 나라>의 주인공은 정인후(조정석 분) 변호사다. 조금 과장하자면, 124분의 러닝타임 중에 단 한 장면도 빠지지 않는 주연 중의 주연이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되짚어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그가 아니라 박흥주 대령 역의 박태주(이선균 분)와 전두환 역의 전상두(유재명 분)다. 정인후를 통해, 박흥주 대령과 전두환이 도드라지도록 설계됐다.

박정희의 피살을 권력 찬탈의 더없는 기회로 삼으려는 신군부의 만행을 정인후의 오지랖 넓은 연기로 당대의 역사를 강의해 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때로는 능청스럽고, 때로는 똑 부러지는 대사는 관객들의 머리에 꽂히고 가슴을 후벼판다.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책임을 지겠다는 박태주의 무뚝뚝한 표정과 대조되어 그 어떤 촌철살인의 금언보다 힘이 있다.

영화 속 정인후의 주옥같은 대사가 아니었다면, 전작 <서울의 봄>이 관객들에게 준 '고통'이 그대로 재현될 뻔했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의 특성상, 이미 결과를 알고 보게 된다는 점에서다. 당시 관객들은 전두광(황정민 분)이 이태신(정우성 분)을 진압하고 고문하는 장면이 너무 괴로웠다고 입을 모았다. 오죽하면 '역사가 스포일러'라며, 심장박동 측정 챌린지까지 나왔겠는가.

"재판은 옳은 놈과 그른 놈을 가리는 게 아니야. 이기는 놈과 지는 놈을 가리는 거지."

대사만 놓고 보면 주인공 정인후는 '악역'을 자처하고 있다. 박태주와 전상두의 양극단 가운데 어디쯤에서 헤매다가 박태주와의 만남을 통해 정의를 바로 세우는 변호사로 거듭난다. 돈만 밝히는 그저 그런 변호사에서 무소불위 권력에 맞서는 당찬 변호사가 된다는 설정은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모티프로 한 영화 <변호인>을 떠올리게 한다. 사형 선고를 받은 박태주가 눈물 흘리는 정인후를 보며 건넨 마지막 말도 "당신은 참 좋은 변호사야"다.

"왕이 되고 싶으면 왕을 해. 돈이 갖고 싶으면 대한민국 돈 다 가져. 대신에 사람은 죽이지 마."

영화 말미에 정인후가 기세등등한 전상두를 찾아가 울부짖으며 던진 말이다. 감독의 영악한 의도였을까.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1979년 10.26 당시와 이듬해 벌어진 1980년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2024년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을 이 한 문장으로 묶어냈다는 생각이 스쳤다.

졸속으로 진행된 사형, 그리고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영화 <행복의 나라) 스틸컷 ⓒ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


내란 목적의 계획된 살인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해 박흥주 대령에 대한 군사 재판은 고작 16일간 졸속으로 진행됐다. 이내 사형이 선고됐고, 관련자들의 재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서둘러 사형이 집행됐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전두환의 신군부가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것에 대해 안절부절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박흥주 대령이 세상을 떠난 뒤, 불과 두 달여 만에 광주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벌어진다. "집권에 방해가 되는 이들은 모조리 죽인다"는 전상두의 대답은 복선 구실을 한다.

그런데 이 영화도 조만간 '좌파 영화'로 낙인찍힐 듯하다. 하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친일적 인사들이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동북아역사재단, 독립기념관 등 국책기관장으로 버젓이 임명되는 현 정부의 기준대로라면, 근현대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죄다 '좌파 영화'일 수밖에 없다. 짜깁기와 역사 왜곡으로 점철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 전쟁>과 최근 KBS에서 방영된 <기적의 시작> 등은 논외다.

사족 같지만, 현 정부 들어 전통적인 좌파와 우파의 개념이 바뀌고 시효마저 다해가고 있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상식과 몰상식의 싸움만 남았다고 입을 모은다. 역사가 조롱당하고 정의가 불의에 압도당하는 몰상식한 시대로 퇴행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토록 하수상한 시절, 영화 <서울의 봄>이 그러했듯 <행복의 나라> 또한 '치료제'까지는 아니어도 '진통제'의 역할은 너끈히 해낼 것으로 확신한다. "의연하고 떳떳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던 박흥주 대령의 유언을 곱씹어본다. 두어 달 뒤 광주에서 윤상원 열사는 유언처럼 이렇게 말했다. 뜬금없이, 박흥주 대령과 윤상원 열사가 자꾸만 겹쳐 보인 이유다.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기억할 것이다."
행복의나라 추창민감독 서울의봄 박흥주대령 1026사태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