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FC 라이트급 최고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많은 이들은 2016에서 2018년까지를 꼽고 있다. UFC 역사상 최고의 흥행메이커 코너 맥그리거(36·아일랜드)가 활약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전성기 때 맥그리거의 흥행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그가 라이트급이라는 이유만으로 전체급을 통틀어 가장 높은 주목을 받았고 주최 측 역시 그에 맞춰 일정을 계획했을 정도다.
맥그리거가 최고 인기스타인 것은 맞지만 당시 순수 경기력으로는 랭킹 3위 정도로 평가됐던 것이 사실이다. 그보다 더 월등한 2명이 양강체제를 이루고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라이트급 최고를 다투는 선수는 무패전설 하빕 누르마고메도프(35·러시아)와 '엘쿠쿠이(El Cucuy)' 토니 퍼거슨(40·미국)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누르마고메도프와 퍼거슨 그리고 맥그리거를 어떻게 활용해 흥행카드를 만들지 행복한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다. 일단 경기력 자체에서는 누르마고메도프가 탑으로 평가받았다. 압도적인 레슬링을 앞세워 상대가 누구든 일방적으로 굴려버리며 멘탈을 털어버리는 괴물 그래플러였다.
실제로 맥그리거와의 대결에서도 예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라이트급 전설의 입지를 확고히 한 바 있다. 아쉬운 것은 퍼거슨과의 대결이다. 퍼거슨은 당시 누르마고메도프를 이길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파이터로 불렸다. 객관적 전력에서는 살짝 밀렸던 것이 사실이지만 특유의 파이팅 스타일상 변수를 일으킬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때문에 둘의 대결은 전세계 격투팬들의 공통된 관심사중 하나였다. MMA 역사상 가장 뜨거운 관심을 불러모았던 '표도르 Vs. 크로캅'에 비견될 정도였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둘의 대결은 예약만 잡아놓으면 취소가 되는 패턴을 반복했다. 무려 5번이나. 어느덧 팬들도 지쳐갔고 이제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기대하는 분위기도 사라진지 오래다.
▲ 토니 퍼거슨(사진 왼쪽)은 여전히 공격적이지만 맷집, 체력, 기술의 날카로움에서 예전보다 훨씬 떨어진다. ⓒ UFC 한국 미디어커뮤니케이션 제공
끈적끈적 장기전의 명수, 누구와 싸워도 까다로웠던 퍼거슨
그렇다면 전성기의 퍼거슨은 어떤 선수였을까? 퍼거슨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최강인 부분은 없었다. 타격 결정력은 맥그리거에 미치지 못하며 레슬링 역시 누르마고메도프와 격차가 컸다. 하지만 대신 그는 매우 다재다능했다. 타격, 주짓수, 레슬링 등 모든 부분에 있어 평균 이상이었던지라 상황에 맞춰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는 플레이가 가능했다.
특히 장기전의 명수로 악명 높았다. 초반 밀리는 듯하다가도 경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서히 페이스를 빼앗아오다가 결국 상대를 잡아 먹어버렸다. 사냥 방식도 독특했다. 다소 지루하더라도 전략적으로 약점을 집요하게 노리는 상당수 파이터와 달리 화끈하게 들이대면서 상대를 질리게 하고 숨통을 끊어버리는 유형이었다. 본능에 충실한 '좀비' 같으면서도 영리한 '사냥꾼' 같았다.
때문에 퍼거슨의 경기는 늘 팬들의 흥미를 끌었다. 특유의 '똘기(?)'를 바탕으로 타격이 강한 상대에게 타격으로 맞불을 놓는가 하면 그래플러와 그라운드 진검승부도 피하지 않았다. 상대 입장에서는 경기 초반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기 십상인데 경기가 진행될수록 페이스가 꼬이고 그 순간 퍼거슨은 악마의 이빨을 드러낸다. '엘쿠쿠이'라는 닉네임처럼 '꿈속의 괴물'로 변신해 상대에게 악몽을 선사했다.
여기에는 퍼거슨이 기술적으로 뛰어난 부분도 있겠지만 체급 최고 수준의 맷집과 체력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어지간한 맹공에도 견디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부분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퍼거슨의 파이팅 스타일은 상대를 탐색하는 능력이 뛰어나기에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많았다.
퍼거슨은 싸움꾼 특유의 감각을 통해 상대의 패턴을 경기 중에 읽어내고 어느 정도 파악됐다 싶으면 약점을 파고들어 속도를 올린다. 상대가 어떤 유형인지는 경기 전에 당연히 알고 나왔겠지만 직접 몸을 섞어보며 타이밍, 거리감을 느끼고 더불어 무한체력으로 기를 죽여가며 흐름을 빼앗아버린다.
하지만 이런 '슬로우 스타터' 본능은 장점이자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서서히 자신의 흐름으로 잠식시켜 잡아먹기 전까지 상대의 공격을 상당수 받아주는지라 적지 않은 위기 상황을 맞기도 했다. 연승 기간 중 랭커들과 치렀던 경기들만 보더라도 하나같이 평탄한 1라운드가 없었다. 초반에 너무 많이 고전하는 지라 '맞아야 정신 차리는 스타일'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흘러나왔을 정도다.
불혹의 퍼거슨, 불명예 씻고 반전드라마 쓸 수 있을까?
어쨌든 화끈한 경기 스타일로 정상권에서 경쟁했던 관계로 팬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UFC 라이트급 최다 연승인 12연승 기록도 그가 가지고 있다. 많은 경기를 치르는 동안 누적된 데미지에 몸이 상했던 탓일까. 2020년을 기점으로 퍼거슨은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한다. 단 한번의 승리도 없이 무려 7연패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전 UFC 라이트급-웰터급 챔피언 B.J. 펜과 함께 UFC 최다 연패 공동 1위에 올라 있는 기록이다. 영광스런 기록과 불명예 기록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2019년까지만 해도 25승 3패의 훌륭한 성적이 25승 10패로 곤두박질쳤다. 맷집이 워낙 좋은지라 녹아웃 패배는 당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연패기간 중 2번이나 상대 타격에 무너졌다. 왕년의 퍼거슨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거슨은 아직 옥타곤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불혹의 나이에도 다음 경기를 예약했다. 오는 4일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야스섬 에티하드 아레나서 있을 'UFC 파이트나이트: 샌드헤이건 Vs. 누르마고메도프' 대회가 그 무대다. 이날 대회에서 그는 디 얼티밋 파이터(TUF) 시즌 15 우승자 마이클 키에사(36·미국)와 웰터급(77.1kg)매치로 격돌한다.
이번에도 패한다면 UFC 최다 연패 공동 1위에서 단독 1위가 된다. 그럼에도 퍼거슨은 계속 싸울 생각이다. 연패를 끊기 위해 체급을 올린 그는 "더 많은 경기를 뛸 수 있다. 이번 경기는 마지막 경기가 아니다. 내가 7연패지만 대체 나 말고 누가 8번째 기회를 얻겠는가?" 반문하며 "가능한 한 최선의 경기력을 선보여 내 자리를 지키겠다"는 말로 현역생활 연장 의지를 드러냈다. 한때의 괴물 퍼거슨이 반전 드라마를 쓸 수 있을지 주목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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