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멋있는 여자들은 왜 전부 올림픽에 나올까. 돌이켜보면 매번 그랬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스포츠에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여성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선 본드걸이 되어 얼음꽃을 피운 김연아에게 빠졌고,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선 속절없이 김연경의 스파이크에 넘어갔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선 침착하게 활시위를 당긴 안산에 꽂혔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은 더했다.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여성과 남성 선수의 비율이 동일했다. 그 말인즉슨, 멋있는 여성들이 더 많이 나온다는 것. 나는 그들과 사랑에 빠지다가 이번 여름을 놓쳐버리게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쏘아 올린 총포에 맞은 건 과녁이 아니다. 엎어치기 한 판에 넘어간 건 상대 선수가 아니다. 시차를 꾸역꾸역 참아가며 새벽까지 TV 앞에 앉은 내가 맞았고, 내가 넘어갔다.

"김예지 선수, 저도 좀 쏴주세요" 
 

 7월 28일(현지시간) 프랑스 샤토루 슈팅 센터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사격 공기권총 10m 여자 결선에 앞서 주어진 5분 연습에서 김예지가 과녁을 조준하고 있다.

7월 28일(현지시간) 프랑스 샤토루 슈팅 센터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사격 공기권총 10m 여자 결선에 앞서 주어진 5분 연습에서 김예지가 과녁을 조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전 세계 사람들이 "총으로 쏴달라"고 간청하게 만든 선수가 있다. 한국 사격 대표 김예지다. 그는 지난 28일(현지시각) 프랑스 샤토루 슈팅센터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사격 공기권총 10m 여자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수상과 함께 새삼 지난 5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국제사격연맹 사격 월드컵 장면도 회자되고 있다. 당시 김예지는 공기권총 25m 결선에서 42점을 쏴 금메달을 땄고 세계 신기록을 깼다.

모자를 뒤로 쓴 채 무심한 표정으로 마지막 발을 쏘고, 세계 신기록을 달성해 관중들이 박수치고 환호할 때조차 담담한 김예지. 검은색 복장과 이질적인 안경, 여기에 권총을 든 여성인 김예지는 SF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의 모습에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국내 팬들뿐만 아니라 해외 팬들까지 뜨거운 반응을 보였고 그의 사격 모습은 X에 공유돼 '좋아요' 7.1만, 리트윗 1.6만을 기록했다. "영화 캐릭터 같다", "클래스는 영원하다",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등 각국 언어로 쓰인 찬사가 이어졌는데, 특히 "나도 총으로 쏴달라"는 격한 애정 표현이 눈길을 끌었다.
 

 김예지가 지난 5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국제사격연맹(ISSF) 사격 월드컵 25m 권총 경기를 치르는 영상 중 한 장면

김예지가 지난 5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국제사격연맹(ISSF) 사격 월드컵 25m 권총 경기를 치르는 영상 중 한 장면 ⓒ ISSF


미국 CNN은 지난 7월 31일 '인터넷, 사격 신기록을 세운 한국의 올림픽 선수와 사랑에 빠지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예지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지고, 무심하게 세계 기록을 깨며 최근 인터넷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영국 언론 가디언도 '한국의 가장 멋진 사격 선수 김예지, 파리올림픽 뒤 유명세를 얻다'는 제목으로 "김예지의 '주인공 에너지'와 '쿨한' 태도에 소셜 미디어가 들썩인다"고 찬사를 보냈다.

전 세계인들이 열광하는 김예지가 누군가의 '엄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육아와 출산을 거치며 현역에서 은퇴하는 여성 선수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임실군청의 지원과 함께 육아와 훈련을 병행했고, 마침내 태극마크를 달았다.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한계를 넘어선 한 사람의 투지에 지구촌 곳곳의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푹 빠졌다.

대한민국 유도의 미래, 허미미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여자 57kg급에 출전한 허미미가 2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캐나다 크리스타 데구치와 결승전을 치르고 있다.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여자 57kg급에 출전한 허미미가 2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캐나다 크리스타 데구치와 결승전을 치르고 있다. ⓒ 연합뉴스

 
내가 반한 또 다른 선수는 허미미다. '독립 유공자 후손', '귀화 선수'. 그를 향한 수식어는 많지만, 사실 '허미미'라는 이름 석 자로 설명은 충분하다. 일본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허미미는 6세 때 유도 선수 출신인 아버지를 따라 운동을 시작했다. 2017년 일본 전국중학교유도대회에서 우승하며 '유도 천재' 타이틀을 얻었고, 2019년에는 재일교포 선수로 출전해 한국 전국청소년유도선수권대회를 제패했다.

그러다 지난 2021년 세상을 떠난 할머니가 "미미가 꼭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나갔으면 좋겠다"고 남긴 유언에 따라 한국으로 터를 옮겼다. 허미미는 실업팀 경북체육회 입단 과정에서 자신이 독립운동가 허석 선생의 5대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뒤이어 지난해 자신의 생일(12월 19일)을 앞두고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

허미미는 지난 7월 30일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 드 마르스에서 열린 여자 57kg급 결승에서 은메달을 땄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한국 여자 유도에 영광을 안겼다. 그는 세계랭킹 1위 크리스타 데구치와 6분 35초 동안 연장전까지 치른 끝에 반칙패를 당했다. 허미미는 공격을 주도했지만, 심판진은 위장 공격을 했다며 3번째 지도를 줬기 때문이다. 석연찮은 판정에 팬들은 아쉬움을 표했지만, 허미미는 개인 SNS를 통해 "여러분들과 함께해서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번 시상식 때 부르려고 애국가 가사를 열심히 외웠다던 허미미. 그는 "다음 올림픽 때는 나이를 먹었을 테니까 체력이 더 좋을 것"이라며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꼭 딸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의 포부에 대한민국 유도계가 밝게 빛난다.
 
여성 스포츠에 존중과 관심을
 

 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사우스 파리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탁구 여자 단식 8강전에서 한국 신유빈이 일본 히라노 미우를 상대로 접전 끝에 승리한 후 기뻐하고 있다.

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사우스 파리 아레나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탁구 여자 단식 8강전에서 한국 신유빈이 일본 히라노 미우를 상대로 접전 끝에 승리한 후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파리 올림픽을 빛낸 한국 선수, 그중에서도 여성 선수는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20년 만에 탁구 단식 4강 진출을 이룬 '삐약이' 신유빈, 12년 만에 한국 복싱에 올림픽 메달을 선물한 임애지, 양궁 여자단체 '10연패'의 주역 남수현, 임시현, 전훈영 등 그들의 투지에 대한민국은 금빛 파도를 맞았다.

하지만 그들의 성과와 대비되는 관심도는 아쉬움을 남긴다. 지난 7월 28일 배드민턴 세계 랭킹 1위인 안세영의 조별 라운드 첫 경기는 지상파 채널에서 생중계되지 않았다. 이에 팬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세계 1위 선수의 경기를 왜 보여주지 않느냐", "금메달 후보인 선수를 내쳐도 되나"는 등 여러 비판의 글을 남겼다. 30일 펜싱 세계 랭킹 2위인 여자 에페 단체팀 경기도 생중계되지 않았다.

이렇듯 여성 스포츠는 남성 스포츠에 비해 지원도, 관심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꿋꿋이 나아갔고 마침내 쾌거를 이뤘다. 이들은 어린 여성들에게 롤모델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위로와 자신감을 주는 존재다. 임신 해도, 아이를 낳아도, 나이가 어려도 계속 운동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

오랜 시간 단련했을 근육과 집중력, 무던하게 제 몫을 다 하는 태도, 그들에게서 오늘도 배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여성 선수들이 우리를 저격할까. 역시 올림픽에선 이 선수들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김예지 허미미 신유빈 임애지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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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 밖에 내세울 게 없습니다 계속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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