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베른하르트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은 스웨덴의 발명가이자 기업인으로, '다이너마이트'와 '노벨상'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노벨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는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를 천재 발명가이자 세계적인 사업가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예기치 못한 많은 비극을 불러오기도 했다. 오늘날 인류를 대표하는 최고의 영예이자 노벨이 남긴 최고의 유산으로 꼽히는 노벨상의 탄생 배경도, 사실은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의 죄책감'에서 비롯됐다는 뒷이야기는 유명하다.
 
과연 노벨은 인류에게 불멸의 유산을 남긴 '희대의 발명가'일까. 아니면 인류를 대량살상무기로 공포로 몰아넣은 '죽음의 상인'이었을까. 지난 30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62회에서는 '죽음의 상인 노벨은 왜 노벨상을 만들었나'편을 통해 노벨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이두갑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어린 시절부터 발명가의 꿈 키워
 
 방송 갈무리

방송 갈무리 ⓒ tvN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병약했던 노벨은 발명가였던 아버지의 작업실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불과 5살부터 발명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노벨이 성장하던 19세기 중반 유럽은 전쟁이 수시로 일어나며 열강들의 패권 다툼이 한창이었다. 노벨의 아버지 임마누엘 노벨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후원을 받아 지뢰와 수뢰 개발에 참여하며 무기 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노벨 역시 러시아로 건너가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으며, 부친의 재능을 그대로 이어받아 불과 9살의 나이에 발명을 도울 만큼 화약과 화학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7세가 된 노벨은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선진국에서 화학과 폭발물 기술을 습득하고 경험을 쌓는 것이 노벨의 목표였다. 여기서 노벨은 훗날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나이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나이트로글리세린은 유기화합물의 일종으로 강한 폭발성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적절한 용량을 체내에 투입하면 심혈관계 치료제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위험한 폭발력으로 인하여 전문 발명가들에게도 '악마의 물질'로 불릴 만큼 불안정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물질로 악명이 높았다. 흔히 노벨이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처음 합성한 인물로 잘못 알려진 경우도 많지만, 노벨은 훗날 이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는 것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빈털터리 된 노벨 가문

노벨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1853년 크림전쟁(Crimean War)이 발발한다. 러시아 정부는 전쟁 이후 대금 지급을 약속하며 노벨 아버지의 회사에 대량의 폭탄과 증기기관 개발을 주문한다. 하지만 3년 뒤 크림전쟁에서 패전하고 니콜라이 1세도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노벨 회사와 맺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결국 무기공장은 파산하며 노벨 가문은 다시 빈털터리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노벨은 연구에 몰두하며 유학 시절에 접한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안정화해서 실용화시킬 방법을 찾는 데 집중했다. 당시 나이트로글리세린을 폭약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 최대 문제점은 불이 붙기만 하면 바로 폭발한다는 것이었다.
 
노벨은 아이들이 고무놀이하는 모습에서 힌트를 얻었고, 도화선을 고무줄처럼 길게 만들어놓으면 심지가 타들어 가는 동안은 폭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고안해 낸다. 노벨이 처음 창안한 '뇌관'이라는 구조는 폭발물을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서 폭발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며, 이후로 폭발물의 사용 방식을 바꾼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꼽힌다.

1863년, 30세의 노벨은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이용한 액체 폭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노벨이 만들어낸 액체 폭약은 동시대에 활용되던 흑색 폭약에 비하여 1000배 이상의 폭발력과 소량으로도 큰 폭발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노벨은 폭약 완성 이후 고국 스웨덴으로 돌아와 폭약 제조 방법에 대한 특허를 발급받았고, 본격적으로 공장을 설립하여 액체폭약을 상업용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며 유럽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원자재와 상품, 인력의 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빠른 길을 만들기 위하여 바다와 산을 부수거나, 지형을 바꾸려고 대규모 토목공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폭약의 수요가 높아졌다. 노벨은 액체 폭약으로 큰 수익을 거둬들이면서 발명가이자 사업가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하지만 폭약은 노벨에게 화려한 성공과 동시에 끔찍한 비극들도 연이어 불러왔다. 1864년 9월, 노벨의 공장이 액체폭약 폭발 사고로 전소되면서 동생 에밀을 비롯한 5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이 충격으로 노벨의 아버지도 뇌졸중을 일으켜 식물인간이 되었고 몇 년 후 세상을 떠나게 된다.
 
노벨은 가족을 잃은 아픔과 엄청난 경제적 손실 속에서도 스웨덴 철도청과 맺은 계약에 따라 액체폭약 개발을 계속해야만 했다. 하지만 새로운 공장 설립을 반대하는 스웨덴 정부와 주민들의 여론을 피하여 노벨은 궁여지책으로 호수의 배 위에 임시 공장을 짓고 폭약 개발 작업을 이어 나갔다.
 
비극적인 사고에도 불구하고 액체폭약의 인기는 스웨덴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대됐다. 노벨은 해외에도 공장을 건설하며 사업을 계속 확장했다.

반복되는 폭발사고
 
 방송 갈무리

방송 갈무리 ⓒ tvN


하지만 폭발 사고는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계속됐다. 1865년 4월에는 파나마에서 액체폭약과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선박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며 무려 4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866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는 투숙객이 잠시 맡겨놓은 액체폭약이 든 병을 직원이 실수로 떨어뜨리면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또한 186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사무실에서 또다시 폭발 사고가 일어나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사고의 근본 원인은 사소한 부주의로도 언제든 폭발의 위험에 노출되는 액체폭약의 불안정성에 있었다. 액체폭약을 배송, 운반하는 과정에서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거나 가벼운 충격만 가해져도 언제든 대형 폭발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연이은 사고로 인하여 프랑스와 벨기에 등에서는 액체폭약의 소지와 수송, 사용이 전면 금지되기에 이른다.

반복되는 폭발 사고에 충격을 받은 노벨은 '위험한 환경에서도 폭발하지 않는 폭약'을 고민하다가 고체 형태의 폭약을 고안하게 된다. 어느 날 연구를 하던 노벨은 실수로 나이트로글리세린이 든 약병이 떨어뜨렸으나 다행히 폭발은 일어나지 않아서 목숨을 건졌다. 그 원인을 분석하던 노벨은 공장 바닥에 깔린 규조토(硅藻土, Diatomite)에서 구멍이 많은 구조적 특성상 나이트로클리세린을 안정화한다는 성질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1867년, 우연한 행운과 노벨의 노력이 더해지며 완성된 발명품이 바로 고체 폭약인 다이너마이트(Dynamite)였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힘을 뜻하는 듀나미스(Dynamis)에서 비롯됐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통하여 충격과 열에 취약하던 액체폭약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성공한다.
 
과학사에서 다이너마이트는 '지구의 형상을 가장 많이 바꾼 인류의 발명품'이라는 평가로 요약된다. 다이너마이트는 도로, 운하, 철도 건설 등에 사용되며 산업혁명의 가속화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 동서부를 잇단 대륙횡단 철도, 알프스산맥을 관통하는 고르하르트 터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뉴욕 이스트강의 홍수바위 제거, 미국을 대표하는 대통령 4인의 얼굴을 새긴 러시모어산 조각상 등이 다이너마이트가 사용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인류는 다이너마이트의 등장으로 기존에 사람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일을 상당히 대체할 수 있게 됐으며, 산업현장에서 꼭 필요한 요소가 된다. 다이너마이트는 지금까지도 산업 각 분야에서 두루 활용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주재료인 나이트로글리세린을 고체화한 기술을 응용하여 우주개발을 위한 로켓의 재료로도 사용되고 있다.
 
1886년, 53세가 된 노벨은 세계 최초의 글로벌 기업은 노벨 다이너마이트 신탁 회사를 설립하고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재벌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연구와 사업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노벨에게도 평생 풀지 못한 마음속의 응어리가 남아있었다.

노벨이 내린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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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갈무리 ⓒ tvN

 
정작 노벨은 가정적으로는 매우 외롭고 불우한 삶을 살았다. 중년에 접어들며 가족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자 극심한 외로움을 토로하던 노벨은, 몇 차례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나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못했고 끝내 평생을 독신으로 남았다.
 
노벨이 가장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진 여성은 25세 연하의 소피 헤스라는 인물이었다. 노벨은 소피가 원할 때마다 경제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한때 2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보낼 만큼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피는 그저 노벨의 돈만 밝히던 인물이었고, 몰래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결국 노벨은 1891년 끝내 소피와 결별한 이후로는 평생 일에만 매진하며 여생을 '워커홀릭'으로 살았다.

여기에 19세기 후반 들어 노년의 노벨에게 자신이 걸어온 인생에 회의를 느끼게 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자신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가 본래의 목적과 달리, 전쟁과 테러 등에 인명살상용 무기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노벨을 향한 비난도 높아지기 시작한다. 한 일화에 따르면 노벨의 형제인 루드비그 노벨이 사망했을 때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고 착각한 언론사가 오보를 내며 '죽음의 상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고 노벨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스스로 인류를 위해 연구하는 발명가라고 자부해왔던 노벨은 역사에 자신의 이름이 악평으로만 남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크게 절망했다. 오명을 씻을 방법을 고민하던 노벨은 20세기 들어 유럽에서 불기 시작한 국제평화운동의 확산에서 영감을 얻어 '인류를 위해 공언한 이들에게 상을 준다'는 '노벨상(The Nobel Prize)'의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기획했다.
 
노벨은 당시 평화운동가로 명망이 높던 여류문학가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큰 감명을 받아 편지와 성금을 전달하고 국제평화운동의 후원자로 나서기도 했다. 또한 유언장에서는 친족들에게 물려줄 일부 유산을 제외하고, 재산의 약 80%에 이르는 2800만 크로나(현 한화 2000억 원)를 노벨상을 위한 재단 설립 기금으로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96년 2월 10일, 노벨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인하여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노벨 사후 모국 스웨덴에서 '노벨상'을 바라보는 반응은 처음엔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노벨의 유산이 뜬금없이 스웨덴이 아닌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신설된 상을 위해 사용된다는데 노벨의 친족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스웨덴 정부와 국민들까지도 당시에는 곱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노벨의 유지대로 재단은 설립되었다. 노벨 사후 5년 만인 1901년 12월 빌헬름 뢴트겐(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엑스선의 최초 발견자) 등 최초의 수상자 6인이 선정되면서 노벨상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21세기 현재까지 노벨상은 어느덧 과학을 넘어 문학과 평화 분야에 이르기까지 무려 621번의 수상과 1000여 명에 이르는 수상자들을 배출하면서 '인류 발전에 공헌한 혁신가들'의 헌신을 기리는 국제상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민주화와 남북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자신의 업적과 유산이 인류를 위하여 더 가치 있게 활용되기를 원했던 노벨의 바람은 결국 현실이 됐다. 
 
"나의 천 가지 아이디어 중 단 하나라도 쓸모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가난하지만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알프레드 노벨이 생전에 남긴 격언이다.

비록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라는 위험한 도구를 통해 부와 명예를 누린 것도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평화'를 갈구했으며 자신의 유산이 '사람'을 위하여 쓰이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문명의 혁신을 이끄는 도구도, 사람을 죽이는 살상무기가 될 수도 있었던 노벨의 다이너마이트처럼, 인류의 운명을 결정지어온 것도 도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의지'에 달렸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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