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수천 편 본 소위 씨네필 중에선 도입, 그러니까 앞부분만 보고 전체를 짐작할 수 있다 자신하는 이들이 많다. 어디 영화뿐이겠나. 음악과 미술, 문학, 예술이 아니고도 여러 분야에서 처음 잠깐만 보고도 전체 수준을 알 수 있다 말하는 이가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테다. 나조차도 내가 잘 아는 특정 분야에선 그리 말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요리사는 재료를 손질하는 걸 보고 상대의 기량을 가늠할 수 있고, 검객은 상대의 기수식만 보고도 실력을 알아챈다. 가수가 입을 떼자마자 돌아본 경험이 누구나 있고, 화가가 드로잉 몇 번을 슥슥 한 것만으로도 종일 매만진 내 스케치북이 민망해질 때도 있는 것이다.
 
1년 쯤 되었을까. 지휘자로 변신한 첼리스트 장한나가 어느 쇼프로그램에 나가 연주자의 재능을 알아보는 데는 '5초면 충분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작품 안에 깃든 열망과 노고를 알아채는 데 5초보단 더 많은 관심이 주어져야 하지 않느냐 발끈하게 되는 마음이지만, 위에 적었듯 단 몇 초면 재능 있음과 없음이 가려질 때가 많음을 떠올리고 수긍할 밖에 없게 된다.
 
영혼의 포식자 스틸컷
영혼의 포식자스틸컷BIFAN
 
부천서 마주한 인상적인 오프닝
 
영화는 어떨까. 매년 못해도 수백 편의 작품을 본다는 씨네필 조성민씨는 며칠간의 만남에서 '5분만 보면 각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처음 몇 분 만으로도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 작가의 역량 등이 파악된다는 뜻이겠다. 그러고 보면 과연 그러한 것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 밖에 없는 게 오프닝이기도 한 것이다. 관객과 처음 대면하여 그 관심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이후야 빤한 것이니.
 
마찬가지로 도입부가 죽여주는 영화를 볼 때면, 그 이후까지 기대하게 되는 게 자연스런 일이다. <올드보이>를 비롯해 <박하사탕>, <기생충>, <멋진 하루>,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등 시간이 지나도 다시 떠올리게 되는 오프닝을 가진 영화들은 어김없이 명작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조씨의 추천을 받아 선택한 <영혼의 포식자>는 과연 인상적인 오프닝을 가졌다. 프랑스 작은 산간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도로, 중년의 여성이 자가용을 운전하고 있다. 길가에 선 남자가 차를 얻어 타려는 듯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그러나 여자는 그를 외면하고 차를 몰아 앞으로 내달린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동차는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왕복 2차선 도로, 좁은 길 가운데 통나무들이 떨어져 그를 수습하고 있는 것이다. 작업자들이 길을 막고 나무를 다시 트럭에 올리는 동안, 뒤에 선 자동차들은 밀린 채 대기할 밖에 없다. 그렇게 멈춰선 새 저기 지나쳐온 사내가 짐을 들고 차량으로 다가온다. 그를 지나쳐 온 여자로선 민망할 밖에 없는 순간.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고 사내는 여자의 차를 얻어타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포식자 스틸컷
영혼의 포식자스틸컷BIFAN
 
촌스런 제목을 기대로 뒤바꾸기까지
 
차를 타기 위해 사내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경찰 배지다. 그는 아동납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형사라고 저를 소개한다. 이 마을에서 아이들이 거듭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져왔고, 그가 이를 조사하기 위해 왔단 것이다. 운전하는 여성이 이런저런 질문을 해보지만 그는 더 캐물으면 다른 차를 얻어 타겠다며 되레 강하게 나온다.
 
사내는 산골 마을 어느 집으로 가야한다고 그 주소를 말한다. 그런데 여자 또한 그곳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마을일 뿐 아니라 최종 목적지까지 같은 상황, 그 이유가 곧 드러난다. 여자 또한 형사였던 것이다. 차에서 내린 그녀에게 현지 경관이 예를 차려 인사한다. 그녀는 구아르디아노 형사, 이 집에서 사는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 수사를 위하여 파견된 터다.
 
구아르디아노 형사와 사내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듯 따로 행동한다. 살인사건과 아동납치사건은 기묘하게 엮인 듯 보이지만 별도의 것이다. 담당하는 부서부터 소속이 죄다 다른 건지 둘의 상사 또한 서로를 알지 못하는 듯 보인다. 어찌됐든 그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건의 중심으로 다가선다.
 
영혼의 포식자 스틸컷
영혼의 포식자스틸컷BIFAN
 
살인과 실종, 범인에 다가서는 스릴러
 
영화의 오프닝은 다분히 인상적이다. 히치하이킹을 거절하고 앞질러간 차가 멈춰선 사이 뚜벅이 사내가 그 차를 다시 만난다. 경찰임을 밝힌 사내는 여자 또한 형사임을, 것도 저보다 계급이 높은 이임을 알고 깜짝 놀란다. 범죄현장으로 나가는 형사, 그 별것도 아닌 설정을 꼬고 또 꼬아서 인물의 성격과 관계, 상황까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필요한 건 단 5분, 촌스런 제목을 가진 <영혼의 포식자>가 단박에 기대작으로 뒤바뀐다.
 
영화는 범죄스릴러다. 공포스런 대목도 없지 않고 오컬트로 전환될 수 있겠다는 짐작도 군데군데서 고개를 쳐든다. 낯선 시골마을로 흘러든 형사는 확신할 수 없는 이와 팀을 이루어 범죄의 중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사건에 가까이 갈수록 저를 위협하는 일이 생겨나고 이를 해소하며 더욱 가까이 가는 과정이 일련의 범죄스릴러 문법을 연상케 한다.
 
얼마 전 추락한 비행기 사고와 그 뒤 거듭되는 흉악한 살인사건들, 오래 된 아이들의 연쇄실종까지가 마침내 제 정체를 드러낸다. 누군가는 만족을, 또 누군가는 실망을 표할 법한 구성으로, 여러모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도입부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뒷심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영혼의 포식자>가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그런 아쉬움이 든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포스터BIFAN
 
능숙한 도입과 평이한 결말, 용두사미에 그쳤다
 
내게 이 영화를 추천한 조씨도 비슷한 감상을 가진 모양이다. 영화의 공동감독인 줄리앙 모리, 알렉상드르 뷔스티요가 2007년 함께 만든 전작 <인사이드>부터 주목했다는 그다. 전주를 중심으로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향유하는 모임 전북영화문화방 소속 조성민은 "오프닝은 매우 흥미롭다.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부터 첫 번째 사건을 마주하는 순간까지의 시퀀스는 관객을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며 몰입감을 높인다"며 "마을에 숨겨진 비밀과 초자연적인 괴담을 능숙하게 엮어내는데, 데이빗 린치의 <트윈픽스>를 떠올리게 한다"고 감탄했다.
 
그는 이어 "한 겹씩 벗겨지는 미스터리 구조를 잘 활용하여 지속적인 긴장감을 유지한다"면서도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야심차게 준비된 반전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긴장감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반전 자체가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영화는 결국 그저 그런 평작으로 머물고 만다. 아쉽다"고 감상을 전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흔치 않은 용두사미의 전형이다. 용 대가리에 뱀 꼬리,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보잘 것 없는 작품이 되었단 말이다. 그러나 용두사미란 표현에 들어간 용의 비유는 그 비범함이 마침내 무너지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단 징표이기도 하지 않을까. 그만큼 멋진 도입을 빚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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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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