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는 과거에 사로잡힌 채 유령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JTBC
과거는 바꾸거나 채울 수 없다
나는 이런 귀주를 보면서 상담심리사로서 일하면서 만나 온 사람들이 떠올랐다. 상담실을 찾는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불행의 원인이 과거에 있다 여기고 그 과거를 바꾸고 싶어 한다. 부모님이 조금 더 나를 사랑해 주었다면, 화목한 가정에 태어났다면,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면, 그 시험을 조금 더 잘 치렀다면 지금의 내가 더 행복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끊임없이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그리곤 그 결핍을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는지 방법을 찾고자 한다.
이런 분들이 찾아오면 상담실에서 나는 과거를 탐색하면서 그때의 감정들을 함께 느껴보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음속에만 있던 과거의 일들과 감정들이 입 밖으로 나오게 되고 조금씩 거리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과거를 되돌리거나 채워지지 않은 결핍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결핍과 상실을 받아들이고 다시 채우기를 체념하는 것은 때론 매우 슬프고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 마침내 알게 된다. 과거의 후회와 상처, 결핍을 다스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 부분을 채우거나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차리고 그 영향으로부터 현재의 나를 지키는 것임을 말이다. 이를 깨닫고 나면 그런 과거를 지닌 채 지금까지 애써 살아온 나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며 더 마음껏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곳은 바로 현재
나는 드라마 속 귀주가 다해를 통해 이런 심리적 여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왜 다해로 인해 변화가 생긴 걸까. 드라마는 다해와 귀주의 '운명적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사실 둘의 만남은 많은 부분이 다해의 사기극의 일부였다. 그런데도 귀주에게 변화가 일어난 건 다해가 귀주를 현재에 살게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해가 복씨 집안에 등장하기 전까지 이 초능력 가족은 잃어버린 초능력에 대한 걱정, 혹은 과거에 매몰되어 있었다. 즉, 현재의 삶이 아닌 마음속에 갇혀 지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다해라는 낯선 존재는 가족들에게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을 보게 했을 것이다. 거짓과 진심을 오가는 다해의 오묘한 분위기도 가족들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을 테다.
특히 귀주는 자꾸만 자신과 얽히는 다해의 존재가 궁금해 "자기와의 싸움에서 모처럼 이겨서"(2회) 출근을 하기도 하고, 다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외출을 하게 된다. 게다가 가족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던 딸 이나와 다해가 서로 소통하면서 이나에게 아빠 노릇을 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된다.
이렇게 현재를 느끼기 시작하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초능력이 돌아온다. 하지만, 귀주는 이제 더 이상 가장 행복했지만 선배를 살리지 못한 그때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지금 귀주 옆에 있는 다해와의 시간 속으로 돌아간다. 게다가 되찾은 능력은 전보다 업그레이드 되어 다해를 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는 과거에 사로잡혀 지낸 게 아니라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는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귀주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추억 속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곁에 있는 다해, 즉 현재의 다해인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귀주의 아버지는 5회 다해와 함께 하기를 주저하는 귀주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돌아가서 되돌리면 되잖아. 뒤늦게라도 사과하고, 잘못을 바로 잡고 다해랑은 마음껏 망치고 바보짓 해도 돼. 얼마든지 돌이키고 고치고 그렇게 사랑하면 돼."
이는 과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실수를 인정하고, 현재에서 고쳐나가면 과거가 과오로만 남지는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용기를 낸 귀주는 더 이상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진심을 믿고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자신이 의미있다 여기는 '누군가를 구하는 삶'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