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배를 타고 항해를 하던 때의 이야기다. 영국 사우샘프턴 항에서 내려 6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딱히 사우샘프턴이나 영국에서 하고픈 게 없었던 나는 단 몇 시간의 상륙 동안 무얼 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반드시 보고팠던 풍경이 불과 한 시간여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대로 런던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곧장 내셔널갤러리 34번방으로 향했다. 그곳엔 윌리엄 터너의 걸작 '전함 테메테르의 마지막 항해'가 걸려 있었다. 그 앞에 놓인 벤치에서 2시간을 머물다 돌아온 것이 내 영국여행, 또 런던여행의 전부다.
전함 테메테르는 1805년 있었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종군한 영국 전함이다. 유럽을 휩쓸고 있던 나폴레옹 군대에 맞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영국의 넬슨 제목이 격파한 바로 그 해전에서 공을 세운 전함인 것이다. 이 해전의 결과로 나폴레옹은 고립되고 영국은 제해권을 확보하며 브리튼 섬의 봉쇄를 풀어낸다.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영국이 대제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니 오늘의 영국이 가장 자랑스러워할 한 순간이 바로 그 해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그러나 그림은 과연 어떠한가. 과거의 영광은 간 데 없고 저 멀리 석양이 지고 있다. 커다란 배 하나가 작은 배에 끌려 옮겨지고 있다. 트라팔가르 해전은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범선시대의 종말이며 증기선 시대의 시작점에 위치한 전투였다. 말인즉슨 이 전투에 쓰인 다수 범선은 그 쓰임을 잃을 운명이라는 뜻이었다. 이후 제대로 된 전투 없이 나이를 먹은 이 전함은 30여년이 흘러 작은 증기선에 끌려 육지로 향한다. 해체되어 폐선되기 위해서다. 저 나폴레옹을 격파한 위대한 전함도 새 시대가 닥쳐오는 데야 당해낼 방법이 없었던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