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팜므파탈' 초요갱(楚腰䡖, 세종-예종대 추정, 생몰년 미상)은 15세기 조선 전기를 풍미한 기생으로 여성임에도 공식기록인 실록에 무려 16번이나 이름을 올린 전설적인 인물이다. 조선사에서 기생으로 이름을 남긴 논개나 황진이보다 그녀의 명성이 더 유명해진 이유는, 왕족 및 고위 관직자들과의 연이은 희대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출중한 미모와 재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왕실까지 뒤흔든 초요갱의 진면목은 무엇이었을까.
 
29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84회에서는 '실록에 무려 16번 등장한 전설의 기생, 초요갱은 어떻게 세종의 아들 셋을 사로잡았나' 편을 통해 초요갱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초요갱은 본명이 아닌 기명(기생으로서의 이름) 초요(楚腰)란 '가는 허리를 지닌 초나라 여인'의 의미한다. 과거 중국에서 초나라 왕이 한 궁녀의 가는 허리에 반하여 그녀를 총애했다는 일화에서 유래하여 '절세미인'을 뜻하는 표현으로 전해지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초요갱이 미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초요갱의 이름이 실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4대 세종 시기부터였다. 단종실록에는 초요갱이 '역당의 첩이었기 때문에 관비로 정하였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한양 양민 가문 출신이었던 초요갱은 집안 형편으로 인하여 명문가의 첩으로 들어가 지내고 있었으나, 남편이 모종의 역모사건에 휘말려 처형당하고 자신은 하루아침에 관청의 노비(천민)으로 전락한 것.
 
당시의 기생은 관비에서 뽑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생의 업무는 관리들의 술자리에 동원되어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구는 것이었고, 세간에서는 노비보다 더 천한 평가를 받아야했다. 하지만 기생으로서의 삶은 관비인 초요갱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었다. 초요갱은 관비 중에서 출중한 외모와 가무실력을 바탕으로 단번에 눈에 띄어 기생으로 발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인 기생과 다른 한양 기생만의 특별한 업무는, 여악(女樂, 여자 음악인)으로서 왕실 잔치에서 노래와 춤을 선보인다는 것이었다. 궁중 연회이기에 어지간한 실력을 갖춘 기생이 아니면 무대에 오르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대신 왕실과 고관대작들이 참여하는 행사인 만큼, 기생들에게는 '높으신 분'들에 눈에 띄어서 하루아침에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음악은 예악(禮樂)이라 하여 백성들을 가르치는 수단의 하나로 여겨졌다. 그만큼 공식 연회에서 가무를 담당하는 기생에 대한 관리도 철저하게 진행됐다. 관습도감(慣習都監)은 이러한 궁중행사를 주관하여 연회 및 인력을 관리하는 관청이었다. 관습도감에 속한 기생들은 천한 신분이 아닌 일종의 국가예술인으로 대우받았다.

초요갱은 여기서 단연 출중한 실력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한 초요갱을 보면서 마음을 빼앗긴 인물이 세종의 일곱번째 아들인 평원대군 이임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평원대군은 풍도가 헌걸차고 슬기로우며 왕족임에도 교만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공경하고 사랑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평원대군은 초요갱에게 흠뻑 빠져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첫 남편을 잃고 관비로 전락하며 불행한 삶을 살아야했던 초요갱에게는 왕족의 첩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인생역전이었다.
 
하지만 초요갱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평원대군이 1445년(세종 27년) 2월 천연두에 걸려 불과 19세의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또다시 살아갈 길이 막막할 수 있는 초요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생으로 돌아오는 것 뿐이었다. 관습도감에 속한 기생들은 누군가의 첩이 되어도 중요한 왕실 연회가 있으면 다시 불려나와야 했다. 공식적으로 조선에서 첩이 되는 것은 불법이었기에, 고위층들에게는 묵인은 해주었으나 여성의 제도적 지위는 보장되지 않았다.
 
이러한 초요갱을 주목한 또다른 인물이 박연(朴堧)이었다. 박연은 거문고를 만든 왕산악, 가야금을 만든 우륵과 더불어 한국 역사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초요갱이 박연이 만든 궁중악무를 누구보다 능숙하게 소화해내며 일종의 사제관계를 맺게 된다. 실록에는 두 사람이 실제로 서로를 스승과 제자 관계로 인식했는지는 기록되어있지않지만, 초요갱이 세종 시기 궁중악무를 전수받았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당연히 궁중음악의 총책임자인 박연이 초요갱을 직접 지도했을 가능성이 높다.
 
<용재총화>에는 초요갱의 위상과 성격을 알려주는 일화가 전한다. 최세원이라는 유생은 초요갱에게 마음을 품었으나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었다. 훗날 소과에 급제한후 초요갱을 다시 찾아온 최세원은 "내가 예조(국가행사를 담당하는 관청)의 좌랑이 되어 교만한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예조는 관습도감을 관장하는 곳이기에 좌랑은 초요갱의 직속상관이 되는 격이었다.
 
하지만 초요갱은 두려워하기는 커녕 "이제야 볼기 위에 먼지를 털었구나"라고 놀리며 오히려 최세원을 면박줬다고 한다. 과거 공부를 하느라 엉덩이에 먼지가 수북 쌓였을텐데 이제야 겨우 합격해놓고 큰 소리를 치냐는 비웃음이었다.
 
신분은 비록 기생이었으나 주로 고위직 대상만을 상대했던 초요갱의 눈에, 과거 1차 합격으로 거들먹거리는 최세원은 그저 풋내기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실화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만큼 초요갱이 왕실 연회의 스타로서 높은 명성과 자존심이 지닌 인물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455년, 초요갱으로 인하여 왕실이 발칵 뒤집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세종의 또다른 아들이자 초요갱의 전남편 평원대군의 이복형제였던 화의군이 초요갱과 간통했다는 혐의로 적발된 것이다. 서자인 화의군은 어릴 때부터 여색을 밝혀 왕실의 문제아로 낙인찍힌 인물이었다. 화의군은 평원대군이 죽자 본격적으로 초요갱에게 접근했던 것.
 
당시는 수양대군(훗날의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해가던 시기였다. 화의군은 금성대군과 함께 왕실에서 단종을 지지하던 근왕파였다. 수양대군은 정적인 금성대군과 화의군을 누명을 씌워서 역모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초요갱과의 간통도 뒤늦게 터뜨린 것이었다.
 
화의군은 유배를 가고 초요갱은 간통의 죄를 물어 장 80대를 맞게 됐다. 하지만 초요갱은 수속법(收贖法, 보석금 제도)에 따라 재화를 내는 것으로 장형을 면제받았다. 그럼에도 대신들은 초요갱을 '요물'로 지칭하며 풍속을 더럽히고 허물어뜨린다며 처벌을 요구했다.
 
당시 아직 왕위에 있던 단종은 초요갱에 대한 처벌을 거부했다. 초요갱은 세종시기 제작된 궁중악무의 당시 유일한 전수자였기에 처벌할 수 없었던 것. 초요갱의 예술적 재능이 자신의 목숨을 살린 셈이 됐다.
 
이후 세조 시대에 접어들며 초요갱은 어느덧 30대가 되어 기생으로서는 노년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뛰어난 춤실력으로 한양에서 건재했다. 그런데 초요갱은 얼마후 또다른 스캔들에 휘말린다.
 
계유정난 공신이자 왕실 장례 업무를 맡아보던 신자형이라는 관리가 초요갱을 첩으로 맞아들였다. 초요갱은 신자형의 총애 속에 집안의 경제권을 맡아 첩이었음에도 정실부인과 같은 위세를 누렸다. 그런데 어느날 신자형은 자신을 무시했다는 초요갱의 험담만 듣고, 여종을 때려죽이는 살인을 저지른다.
 
공신세력을 비호했던 세조는 사건을 전해듣고 신자형은 삭탈관직하고 초요갱은 한양 밖으로 유배를 보내는 데 그치는 가벼운 처벌만을 내린다. 하지만 그나마도 세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초요갱을 다시 한양으로 불러들인다. 술과 연회를 유난히 좋아했던 세조가 초요갱의 가무 재능을 아까워하여 은근슬쩍 사면해준 것이다.
 
당시 초요갱을 짝사랑하던 안계담이라는 인물이 초요갱을 간음하기 위하여 그녀의 거처로 야밤에 몰래 침입했으나. 막상 방안에 있던 사람은 신자형의 정실부인이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격분한 안계담은 화풀이로 오히려 신자형의 하인들을 구타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붙잡히며 장 80대의 엄벌에 처해진다.
 
초요갱을 둘러싼 스캔들은 이후로도 그치지 않았다. 안계담 사건 이후 6년 뒤에는 세종의 또다른 아들 계양군과 관계가 밝혀진다. 계양군은 원래 학문과 독서를 좋아하여 세종이 총애하던 아들이었으나 30대 이후 주색에 빠지며 방탕한 인물로 전락했다. 계양군은 초요갱의 미모에 빠져 자신의 형제들과 관계한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다.
 
사실을 알게된 세조는 분노하여 계양군을 불러들여 질책했으나 그는 끝까지 "하늘에 맹세컨대 초요갱과 사통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부인했다. 세조는 하는 수 없이 그냥 넘어가기로 했지만 실록에 따르면 계양군은 세조에게 혼난 그날도 궁을 벗어나자마자 초요갱의 집으로 찾아가 묵었다고 한다.
 
얼마뒤 이번에는 계양군이 초요갱의 집에서 살인사건을 저지르는 대형사고를 치면서 결국 초요갱과 계양군의 관계가 발각되고 만다. 초요갱에게 흑심을 품은 변대해라는 인물이 그녀의 방에서 나오다가 계양군에게 들켰는데, 이에 분노한 계양군이 시종을 시켜서 변대해를 구타하다가 사망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기군망상(임금을 속임)에 살인죄까지 연루된 계양군과 초요갱에게, 정작 끝까지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계양군은 계유정난과 왕위 등극 과정에서 세조의 편에 섰던 인물이기에 차마 화의군처럼 엄한 처벌을 내릴수가 없었다.
 
이후 초요갱은 8대 예종시절까지 생존하여 다섯 명의 왕을 거쳤다. 초요갱을 아끼던 계양군과 세조가 모두 사망하고, 예종은 왕실의 오점을 남기며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던 초요갱을 한양을 떠나 평안도로 보냈다. 하지만 초요갱은 어느덧 40대를 넘은 나이에도 종5품 고위 관료였던 평안도도사 임명지와 또다른 성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했다.
 
예종은 이에 초요갱의 처벌을 고심했으나,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다는 신숙주의 조언에 따라 이번에도 결국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초요갱은 수차례나 죽음의 위기에 몰릴만한 상황에서도 꿋꿋이 '불사조'처럼 목숨을 건졌다. 이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초요갱은 실록에서 등장하지 않기에 그녀가 이후 어디서 어떻게 남은 여생을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초요갱은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은 예인이었음에도 기생이라는 신분과 왕실 스캔들에 연루되어 멸시를 받았다. 당시의 유학자와 사관들은 하나같이 초요갱을 요물이라며 폄하하여 혹평을 내렸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수많은 남성들이 사생활이나 인성이 좋지 않았던 인물도 일에서의 업적과는 구분해서 평가를 받는 것을 감안할 때, 여성이자 천민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없었던 초요갱만을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어쩌면 역사에 타인의 시각으로서가 아닌, 자신의 입장을 직접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면 초요갱의 이야기는 또 다르게 전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벌거벗은한국사 초요갱 기생 조선왕조실력 궁중악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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