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중 어느 누가 그렇지 않겠냐만 영화광 출신 감독으로 유독 유명한 이들이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맨해튼비치 최고의 비디오가게 점원이었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두말이 필요가 없는 독보적인 씨네필이다. 그런 그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영화광이 있으니, 로베르토 로드리게즈도 그중 하나라 하겠다.
 
스물둘의 나이에 캘리포니아 일대 영화판에 대단한 비디오가게 점원으로 소문이 난 타란티노처럼 로드리게즈에게도 따라붙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대학교 재학시절, 가족부터 친구와 지인, 지나가다 만난 사람까지 되는 대로 캐스팅해 찍은 저예산 영화 <엘 마리아치>의 제작 뒷이야기다.
 
명감독의 데뷔작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인 이 영화는 로드리게즈를 한방에 할리우드로 진출시킨 출세작이다. 로드리게즈는 이 영화의 제작비를 마련하고자 제약회사 생동성실험까지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이 감독이 직접 생체실험에 참여해 마련한 돈으로 찍은 영화라는 뒷이야기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가 참여한 실험은 일부러 상처를 내고 연고를 바른 뒤 아무는 속도 및 부작용을 확인하는 실험이었다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비롯해 주머니 사정 얄팍한 한국 청년들 중 여럿이 생동성실험에 참여하고 있으니 그리 먼 이야기는 아닐 테다.
 
힙노틱 포스터

▲ 힙노틱 포스터 ⓒ 케첩 엔터테인먼트

 
할리우드 소문난 괴짜감독의 변신 
 
무튼 그렇게 할리우드에 입성한 로드리게즈는 <황혼에서 새벽까지>, <씬 시티>, <마셰티> 등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할리우드 B급 영화의 기수란 평가를 거머쥔다. 그저 B급 영화라고만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 로드리게즈의 영화 가운데선 영화팬들을 열광시키는 열정과 낭만이 담뿍 묻어나는 작품이 적지만은 않다. 기존 할리우드 문법과도 차별화되며, 보는 이의 쾌감을 극대화하는 그의 영화는 어느덧 그 자체로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해도 좋겠다.
 
절친한 타란티노가 어느덧 은퇴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로드리게즈도 어느덧 할리우드 중견 감독으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그래서일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오락성을 넘어 작품성까지 추구하는 로드리게즈의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누구보다 화끈하게 영화를 찍어온 그가 정통 할리우드의 문법과 결합한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 기대를 불러모으는 것도 사실이다.
 
<힙노틱>은 로드리게즈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2019년 작 <알리타: 배틀 엔젤>에서 정체성을 잃었다는 혹평과 마주했던 그가 절치부심한 결과물이 어떠한지 기대를 모은다. 믿고 보는 배우 벤 에플렉과 윌리엄 피츠너가 주연을 맡았단 점도 흥미를 더한다.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쓰인 사례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최면을 소재로 액션과 SF 장르물을 찍었단 점도 신선하다.
 
힙노틱 스틸컷

▲ 힙노틱 스틸컷 ⓒ 케첩 엔터테인먼트

 
딸을 잃은 형사, 사건에 꽂히다
 
영화는 딸을 잃은 중년 형사 루크(벤 에플렉 분)의 이야기다. 딸과 함께 놀이터에 나간 어느날 그는 딸을 잃어버린다. 용의자인 어느 대학생이 검거되지만 그는 딸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경찰은 사건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루크는 상실의 고통을 잊고자 일에 몰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한다. 시내 은행이 연거푸 털리는 사건 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며칠 몇 시에 은행에 범인이 들 것이란 경고다. 앞서 은행에 든 범인이 돈 대신 개인금고 하나만 털고 사라졌다는 소식은 이 사건에 관심을 더한다. 루크는 범행이 있을 것이라 경고된 날 은행 앞으로 출동해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이가 없는지를 감시한다.
 
그의 눈에 한 중년사내(윌리엄 피츠너 분)가 들어온다. 그는 낯선 이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데, 루크는 그것이 일종의 암호라고 의심한다. 신기한 건 그가 말을 건 이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한 여자는 갑자기 상의를 탈의한 채 차도에 뛰어들고 보안요원들도 총을 들고 은행에 난입한다. 루크는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은행으로 돌입해 개인금고에 접근한다.
 
힙노틱 스틸컷

▲ 힙노틱 스틸컷 ⓒ 케첩 엔터테인먼트

 
승부수는 '최면'... 그대로 충분할까
 
마침내 루크는 범인들보다 먼저 개인금고를 연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상하지 못한 물건을 발견한다. 그건 다름 아닌 사진 한 장, 사진 속에는 루크의 잃어버린 딸이 들어 있다. 그로부터 루크는 은행을 털려던 사내와의 추격전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와 의문의 범인의 싸움은 곧 감춰진 음모로 이어진다. 영화는 루크를 은행털이 범죄를 신고한 이에게 인도하고, 그로부터 베일에 싸인 비밀조직의 존재까지 드러내기에 이른다. 영화는 딸을 찾으려는 루크와 그를 제거하려는 비밀조직의 대결로 이어지며, 반전에 반전이 꼬리를 무는 결말로 나아간다.
 
영화의 승부수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최면이다. 암시로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조작하는 최면은 여전히 현대 과학이 온전히 밝혀내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데, 이를 적극 활용하여 미스터리적 재미와 볼거리를 더하겠단 의도다. 실제로 영화 초중반까지 이는 적절히 먹혀들어, 아마도 영화가 가장 집중하여 찍었을 은행털이 신의 몰입감은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정도는 된다.
 
힙노틱 스틸컷

▲ 힙노틱 스틸컷 ⓒ 케첩 엔터테인먼트

 
설정과 반전, 그 이상이 필요하다
 
문제는 최면이란 설정 말고는 비빌 언덕이 없다는 점이다. 능력자들이 말 몇 마디로 순식간에 거는 최면은 어느 순간 더는 새롭지 않아지는데, 영화는 관객에게 그 이상의 자극을 주지 못하고 허덕이고만 있다. 나이든 배우들의 액션은 힘과 속도가 모두 떨어져 박진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수면 아래 가라앉은 집단 또한 몇몇 배우의 연기에 의지할 뿐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영화는 급격한 반전에 많은 것을 기댈 밖에 없다. 관객을 함정에 빠뜨리지도 몰아붙이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반전이 충격보다는 급작스러운 인상을 남길 것은 빤한 일이다. 이 영화에 주어진 실망스럽다는 평가엔 설정을 제외하고 인상적인 장치 하나를 준비해두지 않은 제작진의 안이함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로드리게즈는 전작 <알리타>에서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제 특색이 살지 않는 무미건조한 작품을 찍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그야말로 수많은 콘텐츠에 둘러싸인 오늘의 관객 가운데 설정과 반전만으로 만족할 이는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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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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