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의 소년들에겐 새 시대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물론 소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신화든 전설이든, 영웅담이며 성공기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새 시대엔 새 시대의 이야기가 쓰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소년소녀들에게 이야기란 항해사의 육분의며 천측계산표와 같아서 불완전한 세상으로 나아갈 때 붙들어 의지할 것이 되어준다. 운이 따른다면 그로부터 오늘 다룰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마침내 처음 꿈꾼 대륙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저 유명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그런 역할을 한 때가 있었다. 영국 탄광마을에서 나고 자란 소년 빌리 엘리어트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소년이 발레리노라는 꿈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발레는 계집애들이나 추는 거라고 여긴 아버지는 소년의 열정을 탐탁찮아 하지만 마침내 그 꿈을 인정하고 응원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는 앞선 세대와 다음 세대의 필연적 갈등, 인정의 갈구와 꿈에 대한 갈망, 책임과 사랑, 마침내 화해와 성취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영화를 보고 나면 비슷한 문제를 겪었을 소년소녀들에게 이 영화가 끼친 영향이 어떠했을지를 단박에 짐작할 수 있다.
 
좋은 영화니만큼 인상적인 대목이 많지만, 그중 한 장면만 떼어 반드시 언급해야 하겠다. 그건 오늘 다룰 영화가 바로 이로부터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저 영향을 받은 수준을 넘어 지난 시대에 <빌리 엘리어트>가 해낸 일을 이 시대엔 제가 해내리라 공표하기까지 한다.
 
온갖 역경을 뚫고 왕립 무용학교 입학면접자리에 온 빌리다. 면접장에서 빌리가 춤을 출 때의 느낌을 풀어놓는 순간이 있다. 면접관이 빌리에게 묻는다. 춤을 출 때 어떤 느낌이 들지? 그러자 빌리가 답한다.
 
"몰라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조금은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 번 시작하면 모든 것을 잊게 되고... 그리고... 사라져버려요.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요. 몸 전체가 변하는 기분이죠.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느낌이에요. 전 그저 한 마리의 나는 새가 되죠. 마치 전기처럼. 네, 전기처럼요."
   
<빌리 엘리어트> 떠올리게 하는 레이싱 영화
 
그란 투리스모 포스터

▲ 그란 투리스모 포스터 ⓒ 소니 픽쳐스

 
닐 블롬캠프의 <그란 투리스모>는 여러모로 스티븐 달드리의 성장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아예 대놓고 이 영화의 명장면을 차용한 장면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게이머가 레이서가 되는 이야기와 시골 소년이 발레리노가 되는, 좀처럼 닮아있지 않아 보이는 두 이야기가 절묘하게 겹치는 순간이 흥미롭다.
 
영화의 주인공은 대학을 휴학하고 집에서 놀고 있는 청년 잔 마든보로(아치 마더퀴 분)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란 투리스모'라는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하는 게 일이다. 이 게임은 레이싱 시뮬레이션이라 불릴 만큼 온갖 기술이 집중된 레이싱게임으로, 자동차와 트랙 등 실제 레이싱의 요소를 섬세하게 구현한 명작이다. 레이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잔이지만 집과 게임방을 오가며 게임만 하는 그를 가족들은 좋게 보지 않는다. 특히 축구선수 출신인 아버지와 역시 엘리트 선수의 길을 걷는 동생은 그를 자동차게임 오타쿠 정도로 보고 잔소리를 해대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잔에게 특별한 기회가 찾아온다. 닛산의 마케팅 부서 직원 대니 무어(올랜도 블룸 분)가 본사를 찾아 게이머들을 실제 레이서로 발탁하는 '그란 투리스모 콘테스트'를 제안한 것이다. 안건은 이사회를 통과하고 무어는 레이싱코치 잭 솔터(데이비드 하버 분)에게 실권을 주고 게이머를 레이서로 육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게임에 빠진 오타쿠 청년, 레이서 되다!
 
그란 투리스모 스틸컷

▲ 그란 투리스모 스틸컷 ⓒ 소니 픽쳐스

 
허구헌날 게임만 하던 청년 잔 마든보로(아치 매더퀴 분)에겐 이보다 더한 기회가 없다. 지역 서버 최강자였던 그에게 콘테스트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 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예선을 가볍게 통과하고 런던에서 각 지역 최고의 게이머들과 진짜 레이서가 될 기회를 놓고 경쟁을 펼친다.
 
영화 속 마든보로가 엘리어트와 겹쳐 보이는 순간이 있다. 마든보로가 고향에서 마음에 든 여자 오드리(메이브 코르티에 분)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마든보로는 그녀에게 제가 레이싱을 좋아하는 이유를 말한다. 어느 순간 집중하게 되는 그 대사는 <빌리 엘리어트> 속 제가 춤을 출 때의 느낌을 말하는 순간과 상통한다. 마든보로는 말한다. 제가 게임을 할 때, 그러니까 한창 다른 차를 제치고 달리는 어느 순간에 저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하나하나 사라지고 저 아닌 다른 차는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순간이 있다고 말이다. 그 순간이 좋아서 그는 계속 레이스를 한다.
 
이후 그는 닛산의 레이서가 되고, 정식 자격까지 취득해 큰 대회에 출전한다. 나름대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역경을 뚫고 전진하는 그와 그의 뒤를 맡아주는 레이싱코치 솔터는 점점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된다. 솔터가 어느 날 마든보로에게 건네는 말이 있다. 오래전 사고를 겪은 뒤 레이싱을 그만둔 그이지만, 모든 것을 잊고 다른 차가 느려지는 순간을 질주하는 그 순간이 이따금은 그립다고 말이다. 그 느낌을 아느냐 묻는 솔터와 그 느낌을 아는 마든보로는 서로를 깊이 이해한다.
 
세대 간 화해와 빈부격차의 극복을 꿈꾸는
 
영화는 아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버지와 제 꿈을 어떻게든 밀고 나가는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축구선수 출신으로 기차역 화물하치장에서 일하는 스티븐 마든보로(자이몬 혼수 분)는 아들이 현실적인 꿈을 갖기를 원한다. 그에게 레이서는 너무 멀고 화려한 직업이다.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주변의 누구도 그 근처에도 다가서 본 적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아들을 위하여서 아들이 꿈꾸는 길을 막아서는 것이다.
 
그의 관점은 불행하게도 사실이기도 하다. 솔터의 옛 선수였고, 마든보로를 막아서는 주된 상대이기도 한 패트리스 캐퍼(토마스 크레치만 분)와 같은 이가 세상에는 널려 있는 것이다. '너보다 못한 선수야, 금수저일 뿐이지'라는 말로 평가되는 이들이 실제 세상에선 '돈으로 우승컵을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난 체제가 막을 내리고 안정적인 세상이 이어진 지 적어도 반 세기에서 한 세기가 된 이 시대에는 할아버지며 아버지의 세대가 거둔 성공에 의지하여 아들이며 손자 세대가 제 성공기를 써내는 경우가 너무나도 흔한 것이다.
 
마땅한 재능이며 열망을 갖춘 마든보로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기회가 카터 같은 평범한 이들에겐 수시로 가서 닿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그로부터 성공을 차지하고 넘보지도 못할 위치에 올라서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란 투리스모>가 새 시대의 이야기인 건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그란 투리스모 스틸컷

▲ 그란 투리스모 스틸컷 ⓒ 소니 픽쳐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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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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