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가 말했다. 세상의 어느 외진 곳에 '내일'이라는 단어를 알지 못하는 종족이 있다고. 그 종족은 내일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내일을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내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내일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개념이 없고 개념이 없어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의 어떤 것은 말로부터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슬픔이란 단어가 있고서야 슬픔을 알게 되듯이.
 
같은 견지에서 단어 하나의 망실은 단어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내일이 없음으로 어느 종족은 미래도, 희망도, 나아짐도 우리와 같은 정도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단어의 소실은 곧 언어와 그 언어를 쓰는 이들의 세계가 축소된다는 뜻이다. 그 축소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풍요롭지 못하다고는 할 수 있을 테다.

2017년 유럽에서 손꼽는 문학상인 메디치상이 책 좀 읽는다는 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무려 22년 만에 이탈리아 작가가 상을 받은 때문이다. 파올로 코녜티의 소설 <여덟 개의 산>은 북부 이탈리아의 척박한 자연을, 또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쓸쓸하고 아름답게 그려내어 호평을 받았다. 움베르토 에코 이후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문학가가 드디어 등장한 게 아니냐는 평가가 쏟아졌을 정도다.

그로부터 5년 뒤 소설을 영상화한 동명 영화가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소설이 묘사한 웅장한 자연을 시각화한 작품은 심사위원상의 영광까지 안았다. 북부 이탈리아의 자연 속에서 사내 간의 우정, 아버지와 아들의 엇갈린 사연, 한 번에 스러지는 사랑, 거듭 괴로움과 마주하는 인간, 온갖 좌절과 상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삶을 그려낸 역작이다.
 
 <여덟 개의 산> 포스터

<여덟 개의 산> 포스터 ⓒ 영화사 진진

 
모두가 떠난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는 소년
 
영화는 여름을 맞아 알프스 자락의 작은 마을 몬테로사에 들어온 모자를 비춘다. 교사인 어머니를 따라 마을로 들어온 소년 피에트로는 마을의 유일한 소년 브루노와 금세 친해진다.

브루노는 다들 떠나가고 남겨진 마을 주민 열한 명 중 하나로, 스스로를 마지막 아이라고 부른다. 도시로 가서 저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 대신 삼촌과 작은엄마가 그를 맡아 키운다. 주민이 없으니 학교도 없어 브루노는 학업 대신 농장 일을 돕는다. 소를 먹이고 젖을 짜며 잔심부름을 하는 게 모두 그의 몫이다.
 
여름마다 몬테로사를 찾는 피에트로와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브루노의 우정이 깊어지는 가운데 이들을 둘러싼 세상은 제 마음대로 흘러간다. 그리하여 우정이 가장 간절한 나이, 둘은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피에트로는 토리노에서 학업을 마친다. 브루노는 벽돌공이 되어 노동자의 삶을 산다. 운명은 그들의 삶을 갈라놓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둘을 한 자리로 이끈다.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길 가에 세워둔 차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피에트로는 아버지와 다투고 집을 나와 몇 년 째 연락하지 않는 중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찾아서 한때는 그가 사랑했던 몬테로사로 향한다.
 
 영화 <여덟 개의 산> 스틸컷

영화 <여덟 개의 산>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아버지의 죽음 뒤 다시 만난 옛 친구
 
겨울이다. 그 옛날 몬테로사에 올 때마다 머물던 집 벽난로에는 무슨 일인지 불씨가 살아 있다. 피에트로는 난로 앞에서 밤을 보낸다. 이튿날 들려오는 오토바이 엔진소리, 집 앞에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서 있다. 그가 브루노란 걸 역시 수염이 덥수룩한 피에트로는 단박에 알아차린다. 어떠한 교류도 없이 십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턱수염을 칭찬한 뒤 피에트로가 말한다. 불을 피워줘서 고맙다고.
 
브루노는 피에트로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남긴 집으로 간다. 산 깊은 곳에 있는 그 집은 집이라기보다는 반쯤 무너진 폐건물이다. 피에트로는 아버지가 제게 남긴 것이 쓰레기라는 사실에 낙담한다. 그러나 브루노는 여기에 다시 집을 짓자고 한다. 그것이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저와 한 약속이라며, 피에트로에게 일을 도우라고 한다. 피에트로가 떠나 있던 사이 브루노는 피에트로의 아버지와 연락을 했던 것이다.
 
영화는 피에트로와 브루노가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짓는 과정을 그린다. 그 집이 완성된 뒤 삶을 던져 할 일을 찾은 이와 찾지 못해 떠도는 이의 모습을 그린다. 끊어졌던 연이 다시 이어지고, 그 연으로도 끌어올릴 수 없는 무너짐을 그린다. 상실과 회복, 희망과 절망, 우정과 고독이 두 시간 이십분 가량의 러닝타임 동안 흘러내린다.
 
 영화 <여덟 개의 산> 스틸컷

영화 <여덟 개의 산> 스틸컷 ⓒ 영화사 진진


모든 것에 최선의 방법이 있다고 믿는 사람

척박한 환경을 개척하려는 이가 있고, 그런 노력을 무가치하게 여기도록 하는 세상이 있다. 가끔은 빠르게 내달리는 세상이 홀로 너무 잘 나서 다른 아까운 것들을 뒤처진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렇게 뒤쳐져서 괴로워하는 이가 실은 다른 이들보다 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 속 무너지는 이의 삶이 우리 가운데 없다고 할 수 없어서 이 영화는 현대 사회에 대한 냉철한 비판처럼도 읽힌다.
 
브루노가 어떤 인간인지를 내보이는 몇몇 장면이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삼촌이 무너뜨린 산사람의 삶을 그는 재건하려 한다. 소를 키우고 젖을 짜고 치즈를 만들어 삶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직접 손으로 젖을 짜는 브루노를 보며 피에트로는 생각한다. 브루노는 모든 것에 최선의 방법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언젠가 괴로움에 몸을 떨던 브루노가 저들의 여름별장에서 책을 들어 이야기하던 장면도 있다. 그는 단어를, 그로부터 앎과 삶에 대해 말한다. 책을 읽기 전에는 세상이 단순했다고 말이다. 좋고 나쁨만 있었을 땐 나빴을 것이다. 그러나 슬픔과 괴로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좌절과 그 밖의 온갖 것들이 책을 통해 그에게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그 모두를 느껴야만 했다.
 
 영화 <여덟 개의 산> 스틸컷

영화 <여덟 개의 산>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산처럼 무거운 영화가 전하는 묵직한 감동
 
그 십수 년 전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브루노의 삼촌이며 그 동료들과 만나던 장면이 있다.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했다. 저기 저 산의 이름이 무엇이죠? 그들이 무어라고 답했다. 그럼 저기 절벽의 이름은 무엇이죠? 그들은 같은 이름을 댄다. 농부들은 단어가 많지 않다. 산은 산이고 저기 뒷산은 뒷산인 것이다. 삶을 대하는 자세도 그와 같아서 저들에게 필요한 꼭 그만큼의 언어들만 갖고 세상과 마주한다. 그것이 그들을 덜 괴롭게 한다.
 
그러나 산사람이길 선택한 브루노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았다. 그로부터 그만큼 더 괴로워해야만 했다. 브루노는 그 모든 상처를 감당하며 갈수록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가둔다. 피에트로는 끝내 그를 구하지 못한다.
 
<여덟 개의 산>은 산처럼 무거운 영화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운명과 고독을 일깨우고 삶 가운데 마주하는 우정과 사랑의 가치를 알게 한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 모든 아름다움을 허망하게 부수어버리는 겨울과 추위와 폭설을 마주하게 한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어느 단면이란 걸 영화를 보는 누구는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예술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덟 개의 산 영화사 진진 펠릭스 반 그뢰닝엔 샤를로트 반더미르히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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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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