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손흥민(토트넘 핫스퍼)에게 "흥민이 아직 월드클래스 아닙니다"라는 냉정한 평가를 내린 손웅정은 손흥민의 아버지이자 아주 엄격한 스승이기도 하다. 손웅정은 부상 때문에 이른 나이에 은퇴를 했고 유소년 축구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아들에게 혹독할 정도로 많은 기본기 훈련을 시켰다. 그 결과 손흥민은 오늘날 프리미어리그에서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만능 공격수가 됐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었던 삼중고의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인권 운동가 헬렌 켈러에게도 앨 설리번이라는 스승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특수교사인 설리번은 21살의 나이에 당시 7살이었던 헬렌 켈러를 가르치기 시작해 장장 50년 동안 헬렌을 지도했다. 물론 일각에서는 헬렌의 사회주의 활동을 부정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수십 년간 자신의 인생을 바쳐 제자의 손발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처럼 훌륭하게 자란 사람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를 뒤에서 서포트 해준 훌륭한 스승이 있는 경우가 많다. 감동적인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도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비록 상업적으론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꿈을 잃지 않은 피아노 학원 원장과 피아노에 탁월한 감각과 재능을 가진 어린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2006년에 개봉한 권형진 감독의 휴먼 드라마 <호로비츠를 위하여>였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전국 54만 관객으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네티즌 평점 9.12점으로 높은 '관객만족도'를 기록했다.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전국 54만 관객으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네티즌 평점 9.12점으로 높은 '관객만족도'를 기록했다. ⓒ (주)쇼박스

 
선한 인상과 안정된 연기 겸비한 배우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박용우는 지난 1994년 이성재, 정준호, 조미령 등과 함께 MBC 공채 24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여러 드라마에 출연하던 박용우는 1997년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을 그린 스릴러 영화 <올가미>에서 고부갈등에 끼인 남편 역으로 출연하며 주목 받았다.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에서는 영화 내내 '낙하산' 취급을 받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 메인빌런 박무영(최민식 분)을 죽이는 이성식 역을 맡았다.

2000년 영화 <동감>에서 김하늘의 짝사랑을 받는 운동권 선배 동희를 연기한 박용우는 2003년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언월도를 사용하는 경대승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2005년에는 퓨전 스릴러 사극 <혈의 누>에서 섬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자 영화의 빌런 김인권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그 해 춘사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코미디 영화 <작업의 정석>에서 손예진을 따라다니는 강성모 역으로 특별 출연한 박용우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주인공 지수(엄정화 분)가 운영하는 피아노 학원 1층에서 피자집을 운영하는 심광호를 연기했다. 이야기가 지수 역의 엄정화와 경민 역의 아역배우 신의재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박용우가 연기한 심광호는 다소 겉도는 면도 있었지만 박용우는 영화가 너무 심각하고 우울해지지 않도록 노련하게 속도조절을 잘 해줬다.

박용우는 같은 해 최강희와 함께 로맨틱 코미디와 스릴러가 결합된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소심한 성격의 대학강사를 연기했고 <감시자들>과 <마스터>를 연출한 조의석 감독의 범죄 스릴러 <조용한 세상>에도 출연했다. 2007년 '스와핑'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룬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에서는 1년 만에 엄정화와 재회해 부부로 출연했다. 남궁민과 연기호흡을 맞춘 <뷰티풀 선데이>에서는 액션 스릴러 장르에 도전하기도 했다.

박용우는 영화 <쉬리>와 드라마 <애정의 조건> 정도를 제외하면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대히트작에는 출연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용우는 안정된 연기와 서글서글한 외모로 큰 공백기 없이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꾸준히 연기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2년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 송서래(탕웨이 분)의 두 번째 남편이자 금융사기꾼 임호신을 연기했던 박용우는 올해 초 ENA드라마 <남이 될 수 있을까> 1회에 특별 출연했다.

'피아노 신동' 가르치는 스승이 된 엄정화
 
 엄정화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천재적인 감각을 가진 신동을 키우는 피아노 학원 원장을 연기했다.

엄정화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천재적인 감각을 가진 신동을 키우는 피아노 학원 원장을 연기했다. ⓒ (주)쇼박스

 
2000년대 중반 한국영화는 관객들에게 소소한 웃음을 주다가 잔잔한 감동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휴먼 코미디 또는 휴먼 드라마 장르가 강세를 보였다. 2004년 수애의 영화 데뷔작이었던 <가족>과 2005년 조승우라는 걸출한 배우를 세상에 알린 <말아톤>,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에서 국군과 미군, 인민군이 한편이 되는 이야기로 전국 800만 관객을 돌파했던 <웰컴 투 동막골> 등이 대표적이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호로비츠 같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지수는 재능과 노력, 집안의 지원이 조금씩 부족해 꿈을 이루지 못하고 피아노 학원 원장으로 생활한다. 그러던 중 세상 모든 소리를 피아노로 표현하는 천재소년 경민(신의재 분)을 만나 호로비츠 같은 피아니스트로 키우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경민(신의재 분)은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마음을 닫은 동네의 천덕꾸러기로 지수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사실 세속적인 피아노 학원 원장이 천재소년을 키우면서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다가 제자의 성장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외국으로 보낸다는 설정은 딱히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호로비츠를 위하여>는 엄정화, 박용우의 안정된 연기와 웃음, 감동코드가 적절히 섞인 무난한 연출, 그리고 영화 내내 흐르는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가 조화를 이루며 N 포털사이트 네티즌 평점 9.12점을 받았을 정도로 '관객 만족도'가 뛰어난 영화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했던 엄정화는 2001년 7집 활동을 끝으로 배우활동에 더 집중했다. 엄정화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시작으로 <싱글즈>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오로라공주>에 잇따라 출연하며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잡았다. 엄정화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도 실감나는 '생활연기'를 통해 '원톱배우'에 어울리는 존재감을 보여줬다.

권형진 감독은 엄정화의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조감독 출신이다. 권형진 감독은 13년 후 다시 엄정화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호로비츠를 위하여>를 통해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해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2008년 유해진, 진구 주연의 <트럭>이 54만, 2010년 송윤아, 김향기 주연의 <웨딩드레스>가 14만, 2015년 마동석 주연의 <함정>이 25만 관객에 그치면서 흥행과는 좀처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전문 아역배우 대신 '피아노 신동' 캐스팅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또 다른 주인공 신의재는 이 작품 전까지 연기경험이 전무한 아역배우였다.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또 다른 주인공 신의재는 이 작품 전까지 연기경험이 전무한 아역배우였다. ⓒ (주)쇼박스

 
권형진 감독은 영화에서 주인공 지수만큼 중요한 경민 역을 캐스팅하면서 연기를 잘하는 아역배우보다는 실제 피아노 연주가 가능한 배우를 원했다. 그리고 2004년 피아노스타 피아노 콩쿠르와 2005년 처인 전국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출중한 피아노 실력을 가진 신의재를 경민 역에 캐스팅했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신의재의 캐스팅은 권형진 감독과 제작사 입장에서는 꽤나 큰 모험이었다.

하지만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경민은 부모의 사고로 큰 충격을 받고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조용한 아이로 설정됐다. 관객들도 중반까지의 내용을 통해 경민이가 말이 없는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후반에 다소 어색할 수 있는 신의재의 눈물연기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당시의 신의재를 기억하는 관객들은 신의재가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을 거라 예상하겠지만 현재 신의재는 '시니재'라는 인디밴드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호로비츠를 위하여> 제작진이 영화에서 가장 신경 써서 만든 장면은 장성한 경민이 국내 공연에서 지수를 위해 연주를 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이 장면은 피아니스트 김정원이 성인 경민 역으로 특별 출연해 품격 있는 연주를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마치 클래식 공연장에 와 있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비록 한국어 대사는 "감사합니다"와 "사랑합니다" 밖에 없었지만 김정원 피아니스트는 음악으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감정들을 표현했다.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한 지수 대신 5년간 해외 유학을 다녀온 후 유명 피아니스트가 된 정은 역은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이선균의 아내를 연기했던 윤예리가 맡았다. 흔히 주인공의 질투와 시기를 받는 성공한 인물은 높은 콧대와 거만한 성격으로 주인공을 무시하는 '빌런'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화 속 정은은 악의 없이 지수를 대하는 착한 심성을 가진 인물로 후반에는 경민의 해외 유학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권형진 감독 박용우 엄정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