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자신을 재료로 삼는 연기. 이봉련은 이를 말하며 대학생 때를 말했다. 알려진 대로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그것도 다큐멘터리 흑백 사진이었다. "저처럼 류재숙도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전환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라며 그는 "여러 사건을 만나며 느끼는 고통을 단지 고통으로만 가져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잖나. 행동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타인에게 공감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많이 단단해진 사람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봉련이란 배우가 연기와 캐릭터를 대하는 자세를 드러내는 상징적 일화였다. 꿈도 열정도 없던 청소년기를 지나며 큰 고민 없이 선택한 사진 전공은 진심이 되기도 했다.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고 서울로 올라온 때까지도 이봉련은 스티브 맥커리처럼 무심해 보이지만 세상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을 치열하게 포착하는 작가를 꿈꿨다고 한다. 당시 만났던 은사님 덕이었다. 그러다 취미처럼 모 대학 사회교육원의 뮤지컬과를 야간에 다니면서 인생이 바뀐다. 당시 강사였던 김동연 연출의 공연을 돕다가 연기를 접하게 된 것. 그렇게 2005년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가 그의 연기 데뷔작이 됐다.
언제든 뛸 수 있다는 자세
"사진 전공 때 대상을 관찰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 같다. 연기도 결국 관찰이 중요하니까. 연기하기로 결심했을 때도 그 일을 평생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한 배우들도 계시겠지만 전 오히려 스태프가 되고 싶었을 정도로 연기에 자신감이 없었다. 처음 무대를 접한 것도 음향 스태프였다. 그저 대학원 수업 끝나고 무료해서 야간 뮤지컬과를 다닌 건데 그 과정이 끝나고 오디션도 보게 됐고, 데뷔까지 하게 된 거지. 그래서 더 겁이 났던 것 같다."
뮤지컬과 연극으로 내공을 쌓아가면서도 영화나 드라마 등 매체 연기 오디션은 번번이 고배를 마시던 때도 있었다. 이봉련은 "몇천 대 1의 경쟁률을 뚫는 배우가 아니면, 다들 오디션에 그렇게 많이 떨어지는 줄 알고 있었기에 큰 스트레스는 없었다"며 담담했던 당시 심경을 전했다. <응답하라 1994> <송곳> 같은 드라마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같은 여러 영화에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게 되면서 매체 연기 경력 또한 하나둘 쌓였다.
"다양한 역할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단역, 조연) 경력이 쌓이면서 뭔가 무료해지고, 열정만으로는 연기자를 계속하기 어려워지는 시기가 오는데 그때를 견딜 수 있었던 게 무대 덕이었던 것 같다. 공연에선 크고 작은 다양한 캐릭터를 할 수 있었으니. 매체 쪽에선 내가 아직 부족하구나 더 노력해야겠다 생각하곤 했다. 사실 그 노력도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풀리거든. 그게 제겐 <스위트 홈> 같은 작품이었다. <런온>도 그렇고. 시청자 분들께 각인될 수 있는 타이밍이 왔다."
지난해 경험한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그리고 기존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여성 서사로 전환한 연극 <햄릿>은 이봉련에겐 중요한 환기점이었다. 전자는 보다 많은 대중이 그의 연기와 이름을 기억하게끔 했고, 후자는 연기 인생 중 처음으로 수상의 영광을 준 작품이다. 특히 <햄릿>은 코로나19 팬데믹이 극심해지며 온라인으로만 진행됐다는 점에서 그에게 남다른 깨달음을 줬다고 한다.
"무대 연기를 오래 했지만 (짧은 등장임에도) 사실 모든 작품이 하나하나 의미가 있었고, 그 두 작품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달라진 건 아니지만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지 못했는데 상을 받은 것도 그렇고, <차차차>도 그렇고 결국 제가 하는 일은 관객을 향해 있다는 걸 깨닫게 했다. 내 만족이 아닌 관객, 시청자에게 향해 있구나, (연기라는 건) 나 혼자 할 수 없는 거구나 싶었지. <햄릿>도 온라인에서만 상영됐는데 공연장에서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보셨다고 알고 있다."
그 기저엔 치열함이 있어 보였다. 경상북도 포항출신임에도 <응답하라 1994> 등의 작품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아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는 연습 덕이었다. 봉준호 감독이 그의 연극 <만주전선>을 보고 <옥자>에 캐스팅했고, 단 몇 장면의 출연이었지만 이봉련을 가장 주목하는 연극배우로 언급했던 것도 그의 치열함을 잘 알고 있어서 아닐까.
"종종 제가 멈춰 있거나 출발선에 서있기만 한 기분이 들 때도 있는데 작품이 없어도 언제든 '땅' 하면 뛸 수 있는 준비를 해놓으려 했다. 물론 너무 그렇게만 생각하면 경직되기도 하니까 (일상에서) 조절은 잘해야 할 것 같다. 초반엔 사람들이 제게 기대하는 걸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는데 점점 부담이 생기더라. 그래서 이젠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할지 그 생각은 놓아버렸다. 이미 대본에 잘 나와 있으니 대신 제가 고유성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 한다. 그리고 현장에서 어떤 요구가 있을 때 수용하려는 마음의 넓이랄까 그걸 넓히는 자세를 가지려 한다. 근데 이게 참 어렵더라(웃음). 배우 고유의 고집이나 신념도 갖고 가면서 수용력도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