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지>의 한 장면. 리지(클로에 세비니 분)에게 화가 나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비둘기들의 목을 자르는 앤드류(제이미 쉐리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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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거듭 권위로 다른 이를 억누르는, 못난 남성상을 드러낸다. 하녀의 이름을 빼앗고 딸의 외출을 막으며 사치라는 이유로 집안에 불을 켜는 것조차 금지하는 앤드류의 모습이 그렇다. 또 자신에게 대드는 리지를 성적으로 제압하려 드는 존의 모습도 그렇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자인 리지는 변호사를 찾아 자문을 구하고 전당포에 물건을 파는 일조차 해낼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다. 보든 가의 변호사는 오로지 아버지의 이익만 대변하며 전당포 주인에게 판 물건은 고스란히 아버지의 손으로 전해진다. 리지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맥닐 감독은 보든 가의 저택을 불안하고 답답한 공간으로 연출해, 리지가 느끼는 고립감과 압박감을 표현한다. 어둠이 깔린 공간이 인물을 짓누르고 장작이 타는 소리조차 불편하게 거슬리는 공간이 리지의 집이다. 저택 본채에서 떨어져 있는 헛간이 리지에겐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안식처지만 극적 긴장이 고조되며 앤드류는 이곳까지 침입해서 리지가 기르던 비둘기들을 무참히 죽여버린다.
영화에서 리지가 집을 벗어나는 장면은 많지 않다. 연극을 보러갔다가 발작을 일으켜 집으로 실려 오는 장면과 전당포와 변호사 사무실에 들러 일을 보는 장면. 모두 어둡고 침침하거나 불안하게 흔들리는 화면으로 그려진 건 우연이 아니다. 아버지의 질서가 살아있는 한 온 세상이 리지에겐 감옥과도 같단 사실을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리지가 실제로 감옥에 갇혔을 때와 선명하게 대비된다. 부모를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 재판을 앞두고 구속된 리지. 브리짓이 리지를 찾아온 장면에서 영화는 감옥 안을 파스텔 톤의 따스한 영상으로 그려낸다. 이곳에서 리지는 이전과는 달리 부드럽고 편안한 표정으로 브리짓을 맞이한다. 마치 주인이 제 방에서 손님을 맞이하듯 자연스럽다. 집 안에선 언제나 날 선 긴장 속에 살았던 리지가 어쩌면 처음으로 온전히 편안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이다. 리지에게 아버지도 그의 억압도 없는 감옥이 집보다 나은 공간인 것이다.
늘 수십 개의 단추로 바짝 잠긴 코르셋을 입고 있던 리지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던 장면 역시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그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이때 리지는 브리짓과 공모하여 코르셋을 벗은 채 알몸으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살해한다. 코르셋을 벗고 알몸이 되어 자신을 억압한 자들을 향해 도끼를 치켜드는 리지와 브리짓은 그대로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어떤 주체를 노골적으로 상징하는 듯도 하다.
도끼를 치켜든 알몸의 여인을 만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