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가 공개한 블랙리스트 명단

지난 20일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가 공개한 블랙리스트 명단 ⓒ 블랙리스트 진상소사위


 대기업 독가점 논란을 심화시키고 있는 CJ와 롯데

대기업 독가점 논란을 심화시키고 있는 CJ와 롯데 ⓒ \CJ/롯데시네마


'블랙리스트와 대기업 수직계열화'

올 한해 한국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상했던 정치적, 산업적 이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온갖 정치적 압박을 받던 한국영화계는 올해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지지로 결집했고, 9년간의 캄캄한 터널에서 빠져나가는 중이다.

블랙리스트는 권력이 정치적인 이유로 배제와 차별을 통해 영화산업을 억누른 나쁜 문화정책이다. 문화예술계 중 특히 저항 성향이 강해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대립해온 영화계는 '주적'이나 다름없었다. 광범위한 영화인들이 포함됐고 이름이 없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만큼 한국영화의 핵심인사들이 자리했다.

스크린 독과점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수직계열화는 문제가 발생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영화계가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지금까지는 토론회나 공청회 등 탁상공론 형태였으나 올해 조직적인 운동을 선언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돌아섰다.

수직계열화는 영화산업을 기형으로 만들어 놓은 고질병과도 같다. 대기업들이 투자와 배급, 상영까지 장악하면서 한국영화를 굴절시켰다. 대기업의 투자가 없으면 영화 제작이 쉽지 않은 지경에 왔고, 대기업이 배급을 해줘야 소유하고 있는 상영관 밀어주기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일반화됐다.

영화 하나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대기업의 영향력은 그동안 블랙리스트와 결합해 정권의 마음에 안 드는 영화를 추락하게 만들기도 했다. 블랙리스트 진상조사를 위한 기구가 만들어지고, 대기업의 독과점을 막기 위해 영화계가 자체적으로 칼을 빼 들었다는 것은 올해 한국영화에서 눈여겨볼 부분이다. 

[블랙리스트] 한국영화를 '적'으로 규정했던 이명박근혜 정권

 지난 1월 문체부 앞에서 블랙리스트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문화예술계 인사들

지난 1월 문체부 앞에서 블랙리스트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문화예술계 인사들 ⓒ 성하훈


'혹시나?' 했던 의구심은 '역시나!'로 확인됐다. '문화 융성'이라는 구호는 과거 장밋빛 구호를 외쳤던 4대강 사업처럼 '대국민 사기'였고, 한국영화 표현의 자유를 옥죄려던 구시대적 행태였다. 이는 마치 적을 대하는 자세와 다름없었다. 

영화 < 1987 >을 연출한 장준환 감독을 비롯해 이창동, 봉준호, 박찬욱, 방은진과 같은 주요 감독과 송강호, 문소리, 정우성 배우 등 연기자들, 김영 프로듀서, 오동진 평론가까지 한국영화 전체가 블랙리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이 만들거나 참여한 작품들은 주시의 대상이었고, 배제와 방해는 필수였다.

지난 20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발표는 그간 의혹을 가졌던 사안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해 줬다. 지난 정권에서 자행된 독립영화 지원 축소 등은 블랙리스트의 일환이었다. 한국영화 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진흥위원회(아래 영진위)는 본연의 자세를 벗어나 지난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를 방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영진위의 주요 사업은 정권이 불편해하는 영화를 막고 거르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었다. 

특히 영진위 내부에서 협력한 직원들의 역할도 컸다. 한국영화계가 그냥 넘길 수 없는 부분이다. 영화계는 새로운 영진위가 이들을 제대로 정리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국정원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문화체육관광부나 이를 토대로 지원 사업에서 <자백> 등 특정영화를 떨어뜨린 영진위의 행태는 치졸했다. 많은 독립영화들이 지원 사업에서 보이지 않게 배제당했고, 올 한해 내내 블랙리스트의 망령은 영화인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20일 영화기자협회가 마랸한 토론회 자리에 함께 한 영진위원장 후보자 권칠인 감독과 오석근 감독

20일 영화기자협회가 마랸한 토론회 자리에 함께 한 영진위원장 후보자 권칠인 감독과 오석근 감독 ⓒ 영화기자협회 제공


그나마 지난 대선을 통해 정권이 바뀐 이후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영진위원장이 물러나면서 정리 수순에 접어들었다. 10월 새로운 9인 위원 선임을 통해 정상화의 단초를 마련했으나 영진위의 정상화는 꽤 긴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영진위원장 후보인 권칠인 감독과 오석근 감독은 27일 오후 영화 기자들과의 토론회를 가졌다. 이들은 토론회 자리에서 "지난 정권 10년 동안 기형적이고 편파적으로 시행된 각종 지원 정책과 지원사업을 전면 재검토해 정상화하고, 독립영화 및 특정 영화 지원 배제 수단으로 악용된 '지원사업' 등도 원상복구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정치적 색채를 담은 저항의 영화들은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현대사를 소재로 마지막에 투표의 중요성을 강조한 <더킹>이나 <노무현입니다>, < 1987 > 등은 영화를 통해 불의한 권력에 맞서려 했던 영화인들의 의지였다. 촛불 정국 이후 개봉한 영화들은 탄압을 예상했다가 탄핵과 조기 대선 덕분에 반전을 이루기도 했다. 촛불 광장에 참여해 연대한 감독과 배우, 제작자 등 수많은 영화인들은 올해 한국영화가 보인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였다.

[대기업 수직계열화] 스크린 독과점이 '독'이 된 <군함도>

 스크린독과점 논란을 일으켰던 <군함도>

스크린독과점 논란을 일으켰던 <군함도> ⓒ CJ엔터테인먼트


독과점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대기업 수직계열화 문제가 표면적으로 크게 이슈가 된 것은 올해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였다. 심리적 마지노선과 같았던 스크린 2000개를 넘기며 집중포화를 맞아야 했다. 대기업 수직계열화의 폐해가 드러난 결과였지만 비난은 오로지 류승완 감독과 작품의 몫이었다.

여기에 더해 영화는 엉뚱하게 친일 논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한국영화인 중 가장 열심히 작품을 통해 정치사회적 문제를 짚어온 류승완 감독과 강혜정 대표로서는 상당히 억울할 수 있는 비난이었다. 감독과 제작자의 의도가 없었음에도 스크린 독과점 논란은 영화를 예상 흥행치에도 못 미치게 만들었다. 

지난 11월 29일 발족한 '영화 다양성 확보와 독과점 해소를 위한 영화인 대책위원회'(이하 반독과점영대위)는 설립 취지문에서 '상영 기회 독점'이라는 불합리함을 불러온 근본적 원인은 왜곡된 산업구조에 찾는 것이 당연한 데도 작품을 만든 특정 영화인에게 책임을 묻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연출됐다'고 지적했다. 문제의 근본은 대기업 독과점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독과점 문제는 대기업을 대표하는 CJ와 영화인들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면서 한층 날카로워진 측면도 있다. 이들의 대립은 배급과 상영을 분리시키는 법안의 국회통과가 불투명해진 데서 확산된 부분도 있다. 

한편, CJ CGV 서정 대표는 지난 7월 대기업 수직계열화를 규제해야 한다는 시각에 대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라며 미국에서 70년 전에 나온 판결로 지금의 영화산업을 재단하고 있다고 불편함을 나타냈다. 영화계는 즉각 구체제의 반동이라며 발끈했고, 대기업 독과점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던 영화인들은 '반 독과점 영대위'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개인의 이해관계가 얽혀 자신들의 일인데도 남의 일 보듯 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진일보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지난 11월 29일 출범식을 가진 반독과점영대위

지난 11월 29일 출범식을 가진 반독과점영대위 ⓒ 성하훈


대기업 자본의 줄 세우기는 독립예술영화 쪽도 예외가 아니다.

독립영화 정책 전문가인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부관장은 최근 CJ가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지적하며 "CJ E&M이 수입한 영화를 CGV아트하우스가 배급하는 시대가 열렸군요. 불모지에서 다양성과 진정성을 이야기하는 데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750개 스크린에서 개봉하는 게 무슨 다양성을 위한 진정성인지 궁금하다"며 계열사의 밀어주기와 문어발식 확장을 비판했다.

이하영 전 시네마서비스 배급이사는 "한국영화가 고사하고 있는 단계"라며 "영화인들이 자각하고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있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영화인들이 올해 반독과점 영대위라는 진지를 구축하면서 대기업 수직계열화를 제한하기 위한 '힘 겨루기'가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CJ 관계자는 최근 <씨네21>과 인터뷰에서 '배급과 상영을 분리하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안 개정에 대해 "스크린이 특정 영화에 쏠리는 현상이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배급하는 영화에만 해당되는 게 아닌데 대기업만 그러한 비난을 감당하는 건 원인과 진단 모두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할 수 없도록 스크린 상한선을 두자는 대안에 대해서는 영화계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반 독과점 영대위에 참여하고 있는 영화감독은 "다른 배급사들을 끌어들여 물타기를 하고 있다"며 "CJ의 영화가 독과점 논란의 중심부에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한국영화 CJ 블랙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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