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너머 동시대 아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EBS 다큐멘터리영화 <길 위의 인생>은 꿋꿋하게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아시아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삶의 무늬를 엮어가는 사람들.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면, 잊고 있었던 그 무엇과 마주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 느낌을 짧은 글로 남겨봅니다. [편집자말]
차를 덖는 부부의 모습 차를 덖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아직 부족함이 많다.

▲ 차를 덖는 부부의 모습 차를 덖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아직 부족함이 많다. ⓒ EBS


첫눈에 끌린 여자에게서는 은은한 차 향이 났다. 여자가 나고 자란 곳은 '차의 고향'으로 유명한 중국의 윈난 성. 여자는 다섯 살 때부터 찻잎을 땄다. 남자는 그런 여자가 좋았다. 남자의 고향 마을에서는 본적 없는 차나무였다. 새벽녘이면 마을은 푸릇한 야생의 차 향내로 가득했다. 그곳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중국 윈난 성 시솽반나 다이족 자치주 멍쑨 촌은 하니족이 거주하는 마을촌락이다. 한족인 텅쯔홍(37)씨는 루회이(32)씨를 따라 이곳에서 보이차를 만든다. 보이차는 윈난 성 소수민족의 발효차다. 10년 전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해 어느덧 윈난 성 소수민족의 번듯한 생업으로 자리 잡았다. 거친 산새에 터를 잡은 소수민족 사람들에게 풍요를 꿈꾸는 "희망의 차"가 된 것이다.

찻잎은 봄부터 가을까지 따지만, 봄 차가 단연 으뜸이다. 갓 올라온 새순만을 꺾어 차를 만든다. 그중 고차수의 찻잎은 단연 최상품이다. 수령 200년 이상의 차나무를 고차수라 한다. 단맛이 풍부해 인기가 좋다. 차 맛은 차나무에서부터 결정된다. 차나무를 재배하는 방법과 찻잎을 제조하는 기술에 따라 다양한 차 맛이 생겨난다. 중국 윈난 성에는 26개의 소수민족이 산다. 그 소수민족마다 차 맛이 다르다. 봄 수확이 끝나면 쯔홍씨 부부는 독특한 차 맛을 내는 방법을 배우러 길을 나선다.

멀고 먼 그 길을 가는 이유

차를 배우러 나선 길 위에서 쯔홍씨 부부가 차를 배우러 가기 위해 윈난 성 시솽반나 자치주의 거친 산길을 달려간다.

▲ 차를 배우러 나선 길 위에서 쯔홍씨 부부가 차를 배우러 가기 위해 윈난 성 시솽반나 자치주의 거친 산길을 달려간다. ⓒ EBS


길을 나서기 위해, 부부는 짐을 꾸린다. 예방주사를 맞아 열이 난 아들 녀석이 쯔홍씨 부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겨우 장난감 선물로 달래보지만, 아픈 아이를 뒤로하고 떠나는 마음은 편치 않다. 앞으로 차나무에 가족의 운명이 달려 있다. 길 위로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최상의 차를 만들 때까지, 모자란 점을 채워야 한다.

쯔홍씨 부부가 달려가는 길은 고산지대의 구불구불한 산길이다. 고단하고 때로는 아찔하다. 하얀색 트럭이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위를 달린다. 아내는 둘째를 임신했다. 트럭 운전대를 잡은 쯔홍씨의 두 손이 무겁다. 그래도 부부가 함께라서 이 여정의 험난함도 반으로 줄어든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펼쳐질 길 위에 몸을 맡긴다. 꽃향기는 천 리를 가고, 차 향기는 만 리를 간다. 차향만리를 찾아 나선 쯔홍씨 부부의 얼굴에 지친 기색이 한가롭게 앉을 새가 없다.

첫 방문지 파사 촌은 추정수령이 족히 1700년이 된 "차왕수"로 유명하다. 차왕수는 차나무들의 왕으로 해마다 3월이면 마을에서 제를 올린다. 보이차는 각 지역마다 차 맛이 다르다. 흔히들 "십 리 안에 있어도 각기 하늘이 다르다"고 할 정도다. 파사 촌의 보이차는 쓴맛이 강하다.

특히 이 지역에는 정부에서 관리하는 차나무가 따로 있다. 차나무마다 정부에서 지정한 고유 등록번호가 달려있다. 쯔홍씨 부부가 차나무에 오른다. 직접 차를 따보며 향기와 맛을 감별해본다. 차나무에 오를 때면 쯔홍씨는 산다는 것이 꽤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튼실한 한 그루의 고차수는 쯔홍씨 부부에게 "평생 기억하고 싶은 만리장성"이나 다름없다.

두 번째로 찾아간 마을은 포랑족이 거주하는 징마이 촌이다. 이곳엔 특별한 차 선생이 있다. 스무 살이 된 앳된 아가씨지만 어엿한 스승이다. 이름난 차 명문가에서 어려서부터 갈고닦은 솜씨라 배워봄 직하다. 이 마을에는 차의 조상을 모시는 사당도 있다. 포랑족의 "차조(차의 조상)"를 모신 곳으로 예의를 갖춰 정성껏 모신다.

이 마을에는 "차혼수"라 불리는 오랜 차나무가 있다. 마을 어른들은 3천 년이 넘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조사한 적은 없다. 마을에 차나무를 퍼뜨린 조상으로 포랑족 사람들의 풍년을 기원하는 나무다. 일상에 풍요를 가져오는 신과 같은 존재로 포랑족의 샤머니즘이 짙게 베어 있다. 그 간절한 기원만큼 징마이 촌의 보이차 맛은 향이 좋고 단맛이 그윽하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하니족이 거주하는 난눠 산이다. 고차수의 산림이 우거진 곳으로 차 재배지로는 가장 유명한 지역으로 꼽힌다. 이 고산지대에는 고차수와 더불어 대나무가 함께 자란다. 이 지역 소수민족 사람들은 대나무를 잘라 찻주전자를 만든다. 하니족만의 전통적인 다도풍습이다. 하니족의 "카오차"는 찻잎을 대나무 통 속에 끓여 마시는 차로 그 맛이 독특하다.

먼저 나뭇가지를 모아 직접 불을 피워 그 위에 대나무 통을 올려놓는다. 대나무 꼬치에 끼워 숯에 찻잎을 타지 않게 굽는다. 대나무 통이 끓기 시작하면 그 안에 담긴 물에 대나무 수액이 녹아든다. 그다음 구운 찻잎을 넣고 끓인다. 카오차는 발효차가 아니라 즉석에서 찻잎을 우려낸 차다. 그러나 발효차 못지않게 향긋하다. 어떻게 사람들은 같은 차를 다른 방식으로 끓여낼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그들이 고수하는 삶의 방식

포랑족의 차조(차의 조상)를 모신 사당 포랑족 사람들은 이곳에 둘러 마을 한 해 차농사의 풍요를 빈다

▲ 포랑족의 차조(차의 조상)를 모신 사당 포랑족 사람들은 이곳에 둘러 마을 한 해 차농사의 풍요를 빈다 ⓒ EBS


루회이씨는 훗날 아들이 차 농사꾼이 된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차 농사는 좋은 추억이 되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일이 고되지 않을 수 없다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땅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것도 큰 축복이라 믿는다. 보이차의 묶은 향을 "발효의 세월이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세월 속에 녹아드는 향기는 찻잎을 따고 덖어내는 수천 번의 손길을 거쳐야 완성된다. 사람의 손끝에서 만 리까지 닿는 향기가 피어난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찻잎은 떫은맛과 단맛을 갖고 있다. 불의 세기에 따라, 덖는 횟수에 따라 찻잎의 맛은 오묘하게 달라진다. 차를 우려내는 시간과 방법에 따라서도 차 맛은 결정된다. 그래서 차는 한 가지 맛으로 결코 통일될 수 없다. 때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니까 한 잔의 보이차 속에는 수천 번의 우연이 담겨있는 것이다. 절대 가볍지 않은 우연 말이다. 우리 인생이 그런 것처럼. 그래서 보이차를 두고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무엇보다 쯔홍씨는 차나무가 고맙다. 쯔홍씨의 짧은 이 한마디가 차 향처럼 가슴 속으로 퍼져나갔다. 한 그루의 나무에 감사의 말을 전하는 삶이라면…. 세상은 온통 무자비한 자본의 폭력과 극에 다다른 경쟁으로 난리법석인데, 해발 1600m 고산지대에서 차나무를 향해 매일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쯔홍씨의 해맑은 웃음이라니. 삶은 살아가기 나름인 것인가. 청정하고 맑은 감사의 마음 한 조각 앞에서, 그토록 부럽고 그토록 부끄러웠다.

쯔홍씨 부부가 만든 차는 일생의 추억과 감사의 마음이 스며있다. 한 잔의 차를 만들어내는 부부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차 향은 행복하기 그지없다. 세상 사람들에게 차마고도는 추억의 옛길이지만, 쯔홍씨 부부에게는 차 맛을 배우러 가는 "현재진행형의 길"이다. 자극적인 현대인의 입맛에 간결하고 소박한 풍미를 전해주는 따뜻한 차 한 잔. 그 속엔 고산지대 따가운 햇볕과 질척한 비바람을 이겨낸 세월의 풍상이 우려나 있다.

<쯔홍씨 부부의 차향만리> <길 위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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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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