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정보기관에 쫓기는 아델라인(블레이크 라이블리 분)

▲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정보기관에 쫓기는 아델라인(블레이크 라이블리 분) ⓒ (주)쇼박스


올가을 한국 극장가의 판도는 액션스릴러 계통의 완승으로 판가름났다. <더 폰>, <특종 : 량첸살인기>, <성난 변호사> 등의 영화가 박스오피스(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10월 26일 기준) 상위권에 줄줄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매년 가을이면 머리를 쳐들던 멜로와 드라마 가운데선 이렇다 할 작품이 없다. 극장에 가도 선택의 폭이 넓지만은 않다.

가을 타는 남자도 시집 읽는 여자도 찾아보기 힘든 시대이다. 멜로물이 SF, 액션, 스릴러, 코미디에 밀려 몸 누일 공간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심지어 코미디를 끼지 않은 정통멜로물은 그야말로 멸종 위기에 처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박스오피스 20위 안에 올라있는 멜로물이 <아델라인 : 멈춰진 시간>, 단 한 편뿐이라는 게 이를 방증한다. 그것도 심지어 20위, 턱걸이다.

지난 15일 개봉한 <아델라인 : 멈춰진 시간>은 개봉 이후 12일 동안 전국에서 3만9185명의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멜로의 계절인 가을, 그것도 거의 유일한 멜로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민망한 수치이다. 주인공 혼자만 늙지 않는다는 잘 먹히는 설정에 블레이크 라이블리, 해리슨 포드 같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를 기용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스크린 수가 줄어드는 게 안타까운 수준이다. 몇 안 되는 상영관조차 텅텅 비는 경우가 많아 멜로물의 시대가 영 가버린 건 아닌가 하는 염려마저 든다.

당황스러운 건 영화가 그렇게 부족한 수준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기억될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두 시간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감성적인 영화이다. 원톱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매력이 시종일관 빛을 발하고, 간만에 스크린을 통해 얼굴을 비치는 해리슨 포드의 열연도 기대 이상이다.

<아델라인 : 멈춰진 시간>은 80년 가까이 29살로 살아가는 여자 아델라인의 이야기다. 우연히 자동차사고에 벼락까지 맞고는 세포의 노화가 멈춘 아델라인. 그녀는 이후 가족과 떨어져 정보기관 등의 추적을 피해 10년 마다 신분과 거주지를 바꿔가며 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녀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온 건 8번째 이사를 앞두고서다. 어느덧 107세가 된 그녀는 새해 전야 파티에서 앨리스라는 남자를 만나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와 사랑에 빠진다.

동화의 현대적 해석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아들도, 아델라인도 열성적으로 사랑한 윌리엄 존스(해리슨 포드 분)

▲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아들도, 아델라인도 열성적으로 사랑한 윌리엄 존스(해리슨 포드 분) ⓒ (주)쇼박스


영화는 전통적인 서양동화를 현대 멜로물로 각색한 작품이다. 감독 자신도 굳이 뿌리를 감추고 싶지 않았는지, 동화적 요소가 곳곳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인 아델라인이 늙지 않게 되며 이야기가 시작해서, 시종일관 그로 인해 고통받다 진정한 사랑을 찾은 후에야 다시금 늙게 된다는 설정. 이는 자연스레 동화 속 마법에 걸린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개구리가 된 왕자님>부터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미녀와 야수> 등 사랑에 빠져 저주가 풀리는 주인공이 얼마나 많았던가.

설정뿐 아니라 구성 역시도 동화를 연상시킨다. '옛날옛적에'로 시작해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상투적인 동화처럼, <아델라인 : 멈춰진 시간> 역시도 중년 남성의 해설로 시작해 같은 방식으로 끝난다. 마치 책표지를 열고 읽기 시작하여 마지막 장을 덮고 끝내듯, 아델라인의 이야기는 실제라기보다는 어떤 가공의 동화같이 여겨진다.

어떤 저주스런 마법에 걸린 후 다시 마법에 풀리기까지가 이야기의 골자라면, 어떻게 이 마법이 풀리는지는 영화의 주제와 닿아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제는 '도피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마주하기'이다. 정보원의 추적으로부터,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끝없이 도망치던 아델라인이 마침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마주하기까지가 영화의 핵심이다. 이를 이룩했을 때 모든 마법이 풀린다. 처음과 똑같이 자동차 사고와 전기충격이라는 방식으로.

멜로와 드라마적 성격에 더해 영화는 인상적인 반전까지 마련해두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델라인과 삼각관계 아닌 삼각관계를 벌인다는 설정이다. 이는 평이하고 동화적인 판타지에 기묘한 긴장감을 불어넣고, 여기에 왕년의 명배우 해리슨 포드의 열연이 더해져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로 빚어진다. 비록 감독의 평범한 연출력이 이야기가 그 이상으로 나가는 걸 방해하고 있지만, 해리슨 포드의 연기와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매력이 영화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란 사실은 명백하다.

엘렌 버스틴은 할리우드 영화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자신보다 어린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진 유일한 여배우 엘렌 버스틴

▲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자신보다 어린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진 유일한 여배우 엘렌 버스틴 ⓒ (주)쇼박스


영화를 보며 가장 흥미로웠던 건 뜻밖에 소소한 지점에 있었다. 아델라인의 딸로 노년의 플레밍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은발이 성성한 여배우 엘렌 버스틴이 자신보다 55살이나 어린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딸로 출연한다.

그 자체로 신선한 풍경이었다. 어머니인 아델라인이 29살부터 늙지 않고 자신만 나이를 먹어 어느덧 여든에 이른 상황, 누구도 처한 적 없을 이 기묘한 상황을 엘렌 버스틴은 훌륭히 연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 배우, 익숙하다. 곰곰이 생각해보곤 무릎을 탁 친다. 그래! 바로 그 배우다!

엘렌 버스틴은 할리우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배우가 될 것이다. 자신보다 더 어린 어머니와 아버지를 둔 인물을 연기한 배우로. 그는 <아델라인 : 멈춰진 시간>에 앞서 자신보다 어린 아버지를 만난 딸을 연기했었다. 그것도 한국에서만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크리스토퍼 놀런의 <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에서 살아 돌아온 아버지가 딸 머피를 찾아갔을 때, 병상에서 임종을 앞두고 있던 머피가 바로 그녀였다. 재미있지 않은가!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포스터

▲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포스터 ⓒ (주)쇼박스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 (주)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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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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