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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1930년대를 질주하는 두 젊은 범죄자, 보니 파커와 클라이드 배로의 삶을 그린 갱스터 무비다. 주제 면에서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이런 보잘 것 없는 건달들이 모든 면에서 허물어져가는 사회의 범국민적 영웅이 된다는 점이다.

형식면에서도 영화는 주목할 만하다. 두 사람의 끔찍한 죽음으로 결말의 절정을 이루는 숏들을 통해 이미지 생성에 대한 영화로서 형식적으로 지속적인 관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주제와 형식을 흥미롭고 복잡한 스토리로 조합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일상적인 사회의 비참함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는 두 사람의 특이한 관계와 폭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송해성 감독의 작품 <파이란>의 강재는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어떠한 정체성이라도 찾기 위해 범죄세계에 입문한 인물은 아니다. 다만, 미성년자에게 성인 비디오를 빌려주거나 인형 뽑기 게임에 사력을 다하는 한심한 인생 막장에 서 있는 삼류 건달일 뿐이다.

어느 날 뒷골목 동기 용식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자기 대신 감옥에 가 줄 것을 강재(최민식 분)에게 부탁한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배 한 척을 마련할 돈이 걸린 달콤한 제안을 받아들인 직후, 위장결혼을 해준 중국 여인 파이란의 부고 소식이 날아든다.

때로는 정말 현실처럼 느껴지는 허구가 존재하기도 한다. 아사다 지로의 <러브레터>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 속의 인물에 대해 “강재처럼 ‘축축한’ 깡패는 시네마스코프 속에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평한 소설가 김영하의 말은 그런 점에서 매우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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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이란>이 비추는 강재의 방 안은 그래서 더욱 지저분하고 음습해 보인다. 그를 통해 세상의 보이지 않는 희망을 말하려고 했다는 감독의 말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 해답은 영화 속에서 한번도 조우하지 않는 두 주인공의 박복한 삶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부푼 꿈을 안고 막 세관검사대를 통과한 파이란(장백지 분)은 취업을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지만 여의치 않다. 그녀는 위장결혼을 해서라도 한국에 남아 돈을 벌어야만 하는 가엾은 처지이지만, 강재에게 위장결혼이란 한시적인 돈벌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후배들에게 인사조차 변변히 받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일하던 비디오 가게에서조차 밀려난 이 남루한 인생에게 파이란은 점점 애정을 느낀다.

그러나, 원작소설에서 나오는 야쿠자의 비장미를 간직한 깡패들의 세계와 제대로 본 적도 없는 두 남녀의 러브 스토리를 적절히 포장해 놓은 영화가 아니라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가치를 한 단계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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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그리움’에 대한 정서로 가득하다. 강재는 6기통 배를 끌어안고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되는 일 하나 없는 밑바닥 인생을 지탱하는 것도 그가 꾸는 꿈 때문이다.

또, 세상 물정 하나 모르는 파이란은 멋모르고 지내게 된 세탁소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지만 돈을 벌 수 있도록 결혼해 준 사려깊은 강재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간다.

<파이란>의 단점이자 장점은 이 ‘작위적인’ 우연이 만들어낸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들이 날생선처럼 살아 있다는 데에 있다. 영화는 강재가 파이란을 느끼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 뜸을 들인다. 파이란의 죽음을 전해 듣고 바닷가에 가 담배를 피우며 오열하는 그 장면에 이를 때까지 영화는 골목을 배회하듯 서성거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데 대부분을 할애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강재의 내면에서 용해되어 잊혀졌던 사랑의 감정을 살아나게 한다. 해변에서 파이란이 남긴 편지를 읽으며 강재가 오열하는 장면을 훔쳐보면서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게 되는 것은 왜일까. 아마 그것은 한심한 삼류건달에게 뒤늦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을 나도 같이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영화 <파이란>이 우리에게 주는 현실감은 그래서 더욱, 명불허전이다.
2003-12-08 09:23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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