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피니티
언제쯤 나는 ‘은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까. ‘은퇴’란 적어도 어느 한 분야에서 내 것이 존재할 때 생겨나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때 되면 누군가에게 내 것을 스스럼없이 물려주고 조용히 떠나야할 때가 오는 것이고, 늘 마주치던 수위와 로비에서 눈인사라도 할라치면 세상사 모두 떠나보낸 것 마냥 커다란 상실감으로 다가올 게 뻔할 것이다.

적어도 슈미트는 내가 떠올린 ‘은퇴’한 사내의 모습 그대로이다. 평생을 몸담았던 보험회사에서 물러나 세상 모두가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그는 이제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던 가족의 일상사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다. 딸의 결혼 상대인 대머리 랜달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물론 잔소리 심한 마누라와 종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자신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퇴’라는 사실은 사실 그를 둘러싼 주변인들에게는 그리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이만큼 가족이 살아왔고, 자식들 모두 제법 머리가 굵어 더 이상 가장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게 될 때가 ‘은퇴’라는 시기와 맞물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가족들만 바라보고 살아왔던 ‘가장’의 무게는 그 시기가 되면 현저하게 떨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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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슈미트가 선택한 것은 바로 하루 77센트를 후원해주는 탄자니아 소년을 소개받는 일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소년에게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속상한 일이나 마음에 담아놓고 미처 털어놓지 못한 말들을 편지에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그는 심장마비로 부인을 떠나보내야만 했고 물건을 정리하던 중에 부인이 자신의 친구와 바람이 난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밀려왔던 비애는 질투심으로 변해갔고, 뒤늦게 그의 관심은‘딸’에 대한 과잉보호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딸을 찾아서 떠난 여행은 철부지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슈미트를 더없이 사랑스럽게 만드는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가 태어난 집이 상점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나 어릴 적 뛰놀던 골목에 스민 젊은 슈미트의 꿈은 ‘은퇴’했지만 그가 꿈꿨던 삶에 대해서는 ‘은퇴’하여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화두’와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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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젠가 ‘IMF’란 된서리를 맞고 거리로 내몰린 이 땅의 아버지들은 저마다 양복을 입고서 산에 올랐다. 아무런 통보 없이 쫓겨나게 된 우리의 아버지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미처 얘기해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일구어놓은 터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그들의 ‘세계’를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그 때, 아버지들을 평소와 다름없이 양복을 갖춰입고 다니던 직장 대신 산으로 산으로 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잭 니콜슨의 뛰어난 연기가 건네주는 삶에 대한 신랄한 풍자 속에서 웃음과 감동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어바웃 슈미트>를 보고 내 자신이 겪을 삶의 ‘은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뒤늦은 ‘자리 찾기’다. 밤늦게 돌아오는 골목길에 누가 나와 보지 않아도 당신들의 자리를 알 수 있도록 “굳세어라 금순아~”로 시작하는 마음들이 ‘은퇴’라는 이름으로 그치더라도 오늘만은 꼭 듣고 싶다. 혹여 어설픈 영웅담이나 어릴 적 골목대장이었던 당신들의 빛나는 추억들을.
2003-08-12 19:49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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