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수천 편 본 소위 씨네필 중에선 도입, 그러니까 앞부분만 보고 전체를 짐작할 수 있다 자신하는 이들이 많다. 어디 영화뿐이겠나. 음악과 미술, 문학, 예술이 아니고도 여러 분야에서 처음 잠깐만 보고도 전체 수준을 알 수 있다 말하는 이가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테다. 나조차도 내가 잘 아는 특정 분야에선 그리 말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요리사는 재료를 손질하는 걸 보고 상대의 기량을 가늠할 수 있고, 검객은 상대의 기수식만 보고도 실력을 알아챈다. 가수가 입을 떼자마자 돌아본 경험이 누구나 있고, 화가가 드로잉 몇 번을 슥슥 한 것만으로도 종일 매만진 내 스케치북이 민망해질 때도 있는 것이다.
 
1년 쯤 되었을까. 지휘자로 변신한 첼리스트 장한나가 어느 쇼프로그램에 나가 연주자의 재능을 알아보는 데는 '5초면 충분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작품 안에 깃든 열망과 노고를 알아채는 데 5초보단 더 많은 관심이 주어져야 하지 않느냐 발끈하게 되는 마음이지만, 위에 적었듯 단 몇 초면 재능 있음과 없음이 가려질 때가 많음을 떠올리고 수긍할 밖에 없게 된다.
 
영혼의 포식자 스틸컷

▲ 영혼의 포식자 스틸컷 ⓒ BIFAN

 
부천서 마주한 인상적인 오프닝
 
영화는 어떨까. 매년 못해도 수백 편의 작품을 본다는 씨네필 조성민씨는 며칠간의 만남에서 '5분만 보면 각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처음 몇 분 만으로도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 작가의 역량 등이 파악된다는 뜻이겠다. 그러고 보면 과연 그러한 것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 밖에 없는 게 오프닝이기도 한 것이다. 관객과 처음 대면하여 그 관심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이후야 빤한 것이니.
 
마찬가지로 도입부가 죽여주는 영화를 볼 때면, 그 이후까지 기대하게 되는 게 자연스런 일이다. <올드보이>를 비롯해 <박하사탕>, <기생충>, <멋진 하루>,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등 시간이 지나도 다시 떠올리게 되는 오프닝을 가진 영화들은 어김없이 명작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조씨의 추천을 받아 선택한 <영혼의 포식자>는 과연 인상적인 오프닝을 가졌다. 프랑스 작은 산간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도로, 중년의 여성이 자가용을 운전하고 있다. 길가에 선 남자가 차를 얻어 타려는 듯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그러나 여자는 그를 외면하고 차를 몰아 앞으로 내달린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동차는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왕복 2차선 도로, 좁은 길 가운데 통나무들이 떨어져 그를 수습하고 있는 것이다. 작업자들이 길을 막고 나무를 다시 트럭에 올리는 동안, 뒤에 선 자동차들은 밀린 채 대기할 밖에 없다. 그렇게 멈춰선 새 저기 지나쳐온 사내가 짐을 들고 차량으로 다가온다. 그를 지나쳐 온 여자로선 민망할 밖에 없는 순간.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고 사내는 여자의 차를 얻어타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포식자 스틸컷

▲ 영혼의 포식자 스틸컷 ⓒ BIFAN

 
촌스런 제목을 기대로 뒤바꾸기까지
 
차를 타기 위해 사내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경찰 배지다. 그는 아동납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형사라고 저를 소개한다. 이 마을에서 아이들이 거듭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져왔고, 그가 이를 조사하기 위해 왔단 것이다. 운전하는 여성이 이런저런 질문을 해보지만 그는 더 캐물으면 다른 차를 얻어 타겠다며 되레 강하게 나온다.
 
사내는 산골 마을 어느 집으로 가야한다고 그 주소를 말한다. 그런데 여자 또한 그곳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마을일 뿐 아니라 최종 목적지까지 같은 상황, 그 이유가 곧 드러난다. 여자 또한 형사였던 것이다. 차에서 내린 그녀에게 현지 경관이 예를 차려 인사한다. 그녀는 구아르디아노 형사, 이 집에서 사는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 수사를 위하여 파견된 터다.
 
구아르디아노 형사와 사내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듯 따로 행동한다. 살인사건과 아동납치사건은 기묘하게 엮인 듯 보이지만 별도의 것이다. 담당하는 부서부터 소속이 죄다 다른 건지 둘의 상사 또한 서로를 알지 못하는 듯 보인다. 어찌됐든 그들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건의 중심으로 다가선다.
 
영혼의 포식자 스틸컷

▲ 영혼의 포식자 스틸컷 ⓒ BIFAN

 
살인과 실종, 범인에 다가서는 스릴러
 
영화의 오프닝은 다분히 인상적이다. 히치하이킹을 거절하고 앞질러간 차가 멈춰선 사이 뚜벅이 사내가 그 차를 다시 만난다. 경찰임을 밝힌 사내는 여자 또한 형사임을, 것도 저보다 계급이 높은 이임을 알고 깜짝 놀란다. 범죄현장으로 나가는 형사, 그 별것도 아닌 설정을 꼬고 또 꼬아서 인물의 성격과 관계, 상황까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필요한 건 단 5분, 촌스런 제목을 가진 <영혼의 포식자>가 단박에 기대작으로 뒤바뀐다.
 
영화는 범죄스릴러다. 공포스런 대목도 없지 않고 오컬트로 전환될 수 있겠다는 짐작도 군데군데서 고개를 쳐든다. 낯선 시골마을로 흘러든 형사는 확신할 수 없는 이와 팀을 이루어 범죄의 중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사건에 가까이 갈수록 저를 위협하는 일이 생겨나고 이를 해소하며 더욱 가까이 가는 과정이 일련의 범죄스릴러 문법을 연상케 한다.
 
얼마 전 추락한 비행기 사고와 그 뒤 거듭되는 흉악한 살인사건들, 오래 된 아이들의 연쇄실종까지가 마침내 제 정체를 드러낸다. 누군가는 만족을, 또 누군가는 실망을 표할 법한 구성으로, 여러모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도입부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뒷심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영혼의 포식자>가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그런 아쉬움이 든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 BIFAN

 
능숙한 도입과 평이한 결말, 용두사미에 그쳤다
 
내게 이 영화를 추천한 조씨도 비슷한 감상을 가진 모양이다. 영화의 공동감독인 줄리앙 모리, 알렉상드르 뷔스티요가 2007년 함께 만든 전작 <인사이드>부터 주목했다는 그다. 전주를 중심으로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향유하는 모임 전북영화문화방 소속 조성민은 "오프닝은 매우 흥미롭다.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부터 첫 번째 사건을 마주하는 순간까지의 시퀀스는 관객을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며 몰입감을 높인다"며 "마을에 숨겨진 비밀과 초자연적인 괴담을 능숙하게 엮어내는데, 데이빗 린치의 <트윈픽스>를 떠올리게 한다"고 감탄했다.
 
그는 이어 "한 겹씩 벗겨지는 미스터리 구조를 잘 활용하여 지속적인 긴장감을 유지한다"면서도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야심차게 준비된 반전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긴장감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반전 자체가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영화는 결국 그저 그런 평작으로 머물고 만다. 아쉽다"고 감상을 전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흔치 않은 용두사미의 전형이다. 용 대가리에 뱀 꼬리,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보잘 것 없는 작품이 되었단 말이다. 그러나 용두사미란 표현에 들어간 용의 비유는 그 비범함이 마침내 무너지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까웠단 징표이기도 하지 않을까. 그만큼 멋진 도입을 빚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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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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