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플라워 킬링 문> 스틸 이미지
롯데엔터테인먼트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80살이 넘은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서발턴(subaltern)'이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만들고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인 가야트리 스피박을 통해 널리 퍼진 '서발턴'이란 용어는 간단히는 '하층민'이란 뜻이지만 보통 더 큰 함의를 갖는다. 하층민인 서발턴은 지배 계급에 종속된 존재지만, 민중이나 프롤레타리아트와 달리 어떤 주체적인 저항조차 불가능한 무기력한 무기명의 집단으로 정의된다.
저항에 관한 한 의지와 수단을 상실해 유령처럼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났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핍박하고 학대한 지배 계급으로부터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상태이다. 지배 계급으로부터 언급조차 되지 않을뿐더러 스스로도 말하기를 포기한 역사의 사각에 놓인 집단이다.
꽃을 죽이는 달
지난 10월 19일 OTT 서비스 애플TV+를 통해 공개된 <플라워 킬링 문>은 아메리카 인디언 오세이지족의 영토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후 부유해진 오세이족과 그들의 부를 노려 하이에나처럼 몰려든 백인 부랑아들이 혼재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백인 남자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인디언 여자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톤)의 사랑을 얼개로 이주민인 백인이 행한 아메리카 원주민 침탈의 역사 마지막 장을 그렸다. 가난한 백인 어니스트와 부유한 인디언 몰리 사이의 사랑은 탐욕이 개입하며 배신으로 얼룩지고, 애초에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출발한 사랑은 예상대로 파탄이 난다.
두 남녀 외에 영화에서 백인 침탈자의 대표 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윌리엄 헤일이란 악당 역엔 스코세이지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로버트 드 니로가 캐스팅됐다.
악당이 있고 선악의 대결이 있으니 서부극이라면 서부극이지만, 보안관 대신 FBI가 나오고 악당 자체도 악의 화신으로 그려지지 않으며 활극 중심의 전개가 아닌 드라마 형식이다. 영화적 문법에 집중하기보다는 미국 땅에서 일어난 비극적 실화를 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스코세이지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이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멀지 않은 과거에 있은, 피해자가 뚜렷한 실제 사건을 극화하느라 자칫 사건의 비극성을 훼손하거나 과장하지 않으려는 게 스코세이지의 생각이었다.
원래 제목 < Killers of The Flower Moon >은 'Flower Moon의 살인자들'이란 뜻으로 'Flower Moon'이 5월을 뜻하니 원제가 의미상 간명하다. 반면 국내 번역 제목인 '플라워 킬링 문'은 조금 난해하다. 'Flower Killing Moon' 자체로도 5월을 의미한다고 하니 원제에서 아주 동떨어진 제목이 아니긴 하다. 다만 시기에 초점을 맞추며 'Killing'을 부각하는 한국어 제목에서 꽃과 달이 각각 무엇을 상징하는지 살짝 고민이 생길 수 있다. 원제는 살인자들(Killers)을 명시함으로써 역사 해석을 분명히 하고 범죄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혼동을 주지 않는다. 동시에 영화가 살인자들 중심의 서사일 수밖에 없다는, 서발턴이란 오세이지족의 본질을 시사하기도 한다.
국내 개봉 제목과 관련해 한마디 하자면 시적 뉘앙스란 표피적 자극에 집중하느라 영화 주제의 본령을 외면했다고 지적할 수 있겠다.
아메리카합중국을 만든 추악한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