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노센트>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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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무구하지 않은 아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선과 악의 탄생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노센트>의 주인공 어린이들은 선과 악의 진영으로 나뉜다.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최초의 선택은 그가 어떤 인간임을 말할 뿐 선택의 동기나 이유를 해명하지 못한다.
악을 대표하는 극 중 어린이에게 환경적 요인이 살짝 엿보이긴 하지만 직접적인 인과는 없는 듯하다. 그냥 그는 악해진다. 어쩌면 악하게 태어났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감독은 현명하게 환경 요인과 아마 유전 요인과 비슷한 말인 '타고 남'을 함께 조건으로 부여한다.
선을 대표하는 극 중 어린이들 또한 그들이 왜 선한지 알 수 없다. 그들이 원래 선하다고 할 수 없다. 관객이 주목하게 되듯 영화 초반에 나중에 선의 진영을 대표하는 어린이가 악한 행동을 한다. 그러나 결국 선을 선택한다. 여기에 깔린 윤리적 입장은 본유관념의 연장인 의무론(義務論, Deontology)이다. J. 벤담이 그리스어 "déon=필요한"이란 말을 활용해 만들어낸 용어로, 의무론을 추종하는 윤리학자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사람이 직관적으로 안다고 설명한다.
<이노센트>에서 선을 택한 어린이들은 무엇이 옳을지를 저절로 깨우치고 상응해서 선한 행동을 의무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의무론의 모습과 닮았다. 보기에 따라 공리주의 측면도 있다. 강력한 한 명의 악인에 맞선 세 명의 선인 집단이 선을 각성하고 받아들이는 까닭이 어찌 보면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며 전체로서 고통을 줄이는 전략과 닮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변형된 공리주의라고 해야 할까.
앞의 논의로 돌아가면 그러므로 아이들이 전혀 순진무구하지 않다는 관점이 관철된다. 그럼에도 약간의 유보조항을 달 수 있는 게 선의 아이들이 선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단순한 의무론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크게 공감하며 그들을 지켜주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의 발로이다. 생판 모르는 타인이 아니라 자매와 친구 같은 친밀한 관계라 더 설득력이 있다. 타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걸 정도로 선 의식이 고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