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 이미지
유니버설 픽쳐스
어떤 영화나 문학이 보편적인 감동을 주는 요인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과 유사하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에서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듯이 보편적 감동을 주는 데 실패한 문학과 영화의 양상 또한 다양하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나쁘지 않은 영화이고,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흐름을 갖추었지만, 극장을 나서며 불쾌에 가까운 느낌이 남는 건 극 중 오펜하이머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이기 때문이다.
놀란이 오펜하이머를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한 것은, "미국 역사상"으로 수정하는 게 맞다. 놀란이 말한 "중요"엔 가치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공헌으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이끄는 국가가 되었기에, 짧은 미국 역사에서 그를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는 인식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게 불가피했는지, 또 일본에 실제로 원폭을 투하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에 관한 역사적 가정은 다른 자리에서 할 일이다. 다만 원폭 투하로 미국 청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선 민간인을 포함해 수십만 명이 고향에서 숨진 것이 사실(史實)로 확인된다. 이후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대거 보유하게 되면서 인간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자멸할 수단을 갖게 됐다. 오펜하이머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고 미국 중심주의 시각에서 우길 수는 있겠지만, 세계 전체로는 그를 프로메테우스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놀란 감독은 관객이 스토리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대형 포맷으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세상에 없는 65mm 흑백 IMAX 필름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CG 사용을 최소화하고 현실감 넘치는 비주얼을 추구한 놀란은 <오펜하이머>에서 '제로 CG'를 구현했다. 그는 "CG를 사용하지 않고 첫 번째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를 구현하는 것은 나에게도 거대한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놀란 팬 사이에서는 그가 <오펜하이머>를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실제로 핵폭탄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냐"는 농담이 돌곤 했다. 그만큼 놀란이 영화적으로 엄격하고, 장인정신으로 무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비교적 가까운 역사를, 그것도 대량살상무기와 관련하여 수십만 명이 사망한 사건을 극화할 때는 영화적 엄격성 못지 않게 역사인식의 엄격성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겠다. 놀란이 그린 오펜하이머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애국자이자, 놀라운 업적에도 부당하게 고통받은 영웅이며, 게다가 윤리적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의 고통을 기꺼이 수용한 양심적인 지식인이다.
평가와 별개로 누구나가 동의하는 사실은 오펜하이머가 미국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인류가 터뜨린 최초 원자폭탄의 개발 책임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트리니티 핵실험 성공 후 케네스 베인브리지가 "이제 우린 다 개새끼야(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라고 적절히 성찰하였듯, 오펜하이머는 '개새끼' 중에서 단연 최고의 '개새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