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 다중우주는 디즈니에게 독이 든 성배였다. 지구를 초월하는, 또 지구수준의, 지역적인 영향력만 지닌, 그야말로 다양한 층위의 다채로운 캐릭터가 존재하는 마블 작품들을 하나의 세계관 아래 불러 모으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성장한 마블 캐릭터를 <어벤져스>로 한 데 모으고, 다시 규모를 거듭 키워가는 과정에서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라 불리는 세계관을 조정하고 정립하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관계를 정립하여 수많은 캐릭터를 한 세계관 아래 불러 모아야만 한 영화를 본 팬이 다른 영화까지 마저 챙겨보도록 하는 폐쇄적 연쇄고리가 작동될 수 있었던 때문이다.
 
<어벤져스> 시리즈로 2010년대 영화판을 주도한 디즈니는 <닥터 스트레인지>부터 멀티버스 세계관을 적극 반영해 실사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로써 어벤져스가 지구를 넘어 우주로 나아가고,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캐릭터들이 공존하며, 사실적 개연성이 떨어지는 판타지적 소재가 적극 채택되기에 이른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어벤져스>, <엑스맨>과 <판타스틱4>, 심지어는 <퍼니셔>와 <엘렉트라>, <고스트 라이더> 등까지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데드풀과 울버린 포스터

▲ 데드풀과 울버린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독이 든 성배 들이켠 디즈니의 결단
 
그러나 기대는 현실과 달랐다. 첫 몇 작품이 참신하단 평을 들었으나 멀티버스를 부각한 작품이 줄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페이즈4, 멀티버스 사가의 시작으로 불렸던 작품군은 줄줄이 아쉬운 성적을 거뒀다. <블랙 위도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이터널스> <토르: 러브 앤 썬더>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까지가 모두 흥행수익 10억 달러 선을 넘는 데 실패했다.

훨씬 전에 나온 <어벤져스> 시리즈 네 편이 모두 14억 달러에서 28억 달러까지 벌어들였다는 걸 고려하면 실패에 가까운 성적이다. 규모 있는 마블영화의 손익분기점이 10억 달러가 넘어가고, 향후 투자가 이에 영향을 받는단 점을 생각하면 마블의 위기감에도 상당한 이유가 있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현시점 디즈니의 구원투수다. <데드풀>은 시리즈 가운데 가장 폭넓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캐릭터이며, 비슷비슷한 분위기로 팬들의 피로감이 누적돼 있는 마블의 작품군 가운데서 독특한 색채를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 <엑스맨> 시리즈의 얼굴인 '울버린'을 더한다면 둘 중 한 쪽에라도 관심이 있는 이는 무조건 극장을 찾을 밖에 없는 것이다.
 
데드풀과 울버린 스틸컷

▲ 데드풀과 울버린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위기 속 꺼내든 필승조, 영광을 재현할까?
 
유일이 아닌 유이라 한 것은 확고한 '믿을맨' <스파이더맨>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그밖에 다른 이유가 아니다. 마블에서 이들이 아닌 다른 어떤 캐릭터도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 바로 지금이 아닌가. 디즈니가 죽은 울버린을 무덤에서 끄집어내 데드풀과 붙여야 할 만큼 위태로운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멀티버스는 시리즈를 운영하는 데 있어 치명적 문제를 갖고 있다. 오스카를 거머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보듯 일회적 작품에선 매력적인 설정으로 활용할 수 있지만, 지속되는 시리즈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유는 명확하다. 서로 다른 우주가 공존할 수 있다면, 아이언맨도 스파이더맨도 울버린과 데드풀도 얼마든지 있다. 마음 담아 응원하고 애를 태우며 보았던 영웅들이 화면 위 그 말고도 수없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 작품에서 아이언맨이 죽었대도 다른 우주에 또 다른 아이언맨이 있으니 다음엔 그를 보여주면 그뿐이다. 유일해서 절대적이고 그래서 귀한 캐릭터가 흔해진다. 흔해지는 순간 관객의 마음 또한 그만큼 흩어진다. 수많은 캐릭터를 연계하기 위해 독이 든 성배를 마셨다면 효과만 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독이 퍼져나간 건 자연스런 귀결이다. 불행히도 페이즈4 전체가 그 독성에 녹아내렸다.
 
데드풀과 울버린 스틸컷

▲ 데드풀과 울버린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울버린의 숭고한 최후가 더럽혀질지라도
 
<데드풀과 울버린>은 시작부터 저들의 지난 선택을 언급한다. <로건>에서 끝내주게 멋지게 죽은 울버린을 무덤에서 파내야 하는 데드풀의 절박한 사정을 보여주고 실제로 그를 해낸다. 울버린의 최후를 더럽히겠다 공언하고 뼈다귀가 되어버린 울버린을 실제로 욕보인다. 그 과정이 너무나 데드풀스럽지만, <로건>을 멋드러진 시리즈의 완성이라 여긴 이들은 배신감과 아쉬움을 느낄 밖에 없는 일이다. 재미야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 가치가 있었는가. 죽은 울버린은 멋지게 물러간 유일한 울버린에서 수많은 울버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유해가 처참하게 유린됐다.
 
영화는 그럴 가치가 있음을 입증하는 과정으로 흘러간다. TVA(시간변동관리국)의 관리자 패러독스(매튜 맥퍼딘 분)가 남몰래 우주 바깥에 위치한 멀티버스의 쓰레기장 '보이드'의 지배자 카산드라 노바(엠마 코린 분)와 계약을 맺고, 필요 없는 캐릭터들을 보내 처리하고 있는 상황이 설명된다.

이곳엔 <엘렉트라>의 엘렉트라(제니퍼 가너 분), <블레이드>의 에릭 브록스(웨슬리 스나입스 분), <판타스틱4>의 조나단 스톰(크리스 에반스 분) 같은 한때 유명했으나 잊힌 캐릭터들, 또 존재감 전혀 없는 <엑스맨> 시리즈의 갬빗(채닝 테이텀 분) 같은 이들이 버려진 상태다. <퍼니셔>의 퍼니셔 같은 이들도 이름이나마 언급된다.
 
데드풀과 울버린 스틸컷

▲ 데드풀과 울버린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꺼져가는 불길 되살리려는 디즈니의 간절함
 
디즈니가 인수한 20세기 폭스의 유산들도 이곳에 흩뿌려져 있다. 20세기 폭스의 로고는 물론, <혹성탈출> 시리즈를 비롯해 20세기 폭스가 제작한 명작들의 상징이 폐허 가운데 박혀 있는 것이다. 현실과 영화를, 또 한 우주와 다른 우주를 오가며 벌어지는 좌충우돌 이야기가 데드풀이란 독특한 캐릭터와 어우러져 영화적 흥미를 전한다.
 
또 한편으로 상시적 멀티버스 설정이 가질 밖에 없는 문제, 즉 쓸모없는 캐릭터들의 폐기처분과 주목받지 못한 캐릭터들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동시에 진행한다. 또 동일한 캐릭터가 수많은 우주에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최악의 울버린의 가치를 찾는 것으로 그를 정돈하려 든다. 이 과정이 충분한 효과를 거두었는지와 별개로 한 번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을 기획이란 점은 분명하다 하겠다.
 
여러모로 <데드풀과 울버린>은 주어진 과제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멀티버스의 채택이 남긴 독성을 최대한 해독하려 시도하는 한편, 무너져버린 흥행의 흐름도 최대한 되살리려 든다. 박수칠 때 떠난 울버린의 캐릭터를 망치면서까지 시리즈를 구하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가장 주요한 목표다.

나는 그 목표가 완수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를 시도했다는 것, 드디어 제가 가진 문제를 알고 정면으로 해소하려 들었다는 것, 나는 그로부터 이 덩치 크고 답은 없는 시리즈의 가능성을 본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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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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