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시인 신경림이 떠났다. 지난 5월 한국 문학은 또 한 명의 거장을 떠나보냈다.
 
시인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1000편 넘는 시를 암송한다던, 이미 죽은 시인들의 발자취를 좇아 소개하는 성실한 시인으로 기억될 수도 있을 테다. 그가 남긴 문학기행문이자 시 해설서인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가 워낙 큰 성공을 거뒀으므로.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보다 많은 이가 시인의 시 한 편쯤은 알고 있으리라고. 또 누구는 그중 어느 구절을 암송하리라고 말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하던 울부짖음을,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하고 되뇌던 시인의 절망을 말이다.
 
울부짖음이 그저 울부짖음으로, 절망이 그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단 건 문학의 미덕이요, 아름다움이다. 시인의 상실과 울음은 시적화자를, 이를 읽는 이를 마침내 일으키리라. 그와 같은 믿음을 피워내는 것, 그것이 문학과 문학에 기반한 작품의 멋이다.
 
체인소 맨 포스터

▲ 체인소 맨 포스터 ⓒ 일본 TV도쿄

 
일본 콘텐츠 산업이 내놓은 흔치 않은 성취
 
일본 TV도쿄에서 방영한 12부작 애니메이션 <체인소 맨>을 보고 얼마 전 별세한 시인을, 그가 남긴 시구를 떠올린 건 낯설면서도 자연스런 일이다. 21세기 영화평론을 한다면서도 애니메이션을 얼마 다루지 않는 나를 질타하는 이가 많았다. 또 일본 콘텐츠 산업의 중심에 선 TV 애니메이션을, 그중에서도 대단한 성취를 거둔 몇몇 작품쯤은 보는 것이 평론가다운 일이라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만이 내보이는 일본의 현실이 있으므로, 또 그것이 오늘의 한국과 통하는 바가 있으므로, 심지어는 여러 작품이 한국에서 기록할 만한 성취를 얻었으므로, 오로지 게으른 평론가만이 애니메이션을 밀어두는 법이라고 나의 애정하는 벗이 나를 질책하였다.
 
<체인소 맨>은 그렇게 추천받은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도쿄 고층빌딩 가운데 얼굴이 전기톱으로 변한 채 피칠갑을 하고 선 인물을 그려낸 포스터는 좀처럼 이 작품 안에 그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의심케 했다. 그러나 평론이란 모든 고정관념에 대항하여 이해를 구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얼어붙은 땅에 곡괭이질 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보지 않겠는가.
 
체인소 맨 스틸컷

▲ 체인소 맨 스틸컷 ⓒ 일본 TV도쿄

 
반인반괴 괴수들이 날뛰는 근미래 이야기
 
이야기는 악마라 불리는 괴수들, 또 마귀라 불리는 반인반괴의 존재들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근미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 가운데, 주인공은 천애고아로 남겨진 십대 소년 덴지다. 덴지는 '체인소의 악마' 포치타와 함께 데블헌터로 살아간다. 데블헌터란 악마를 죽여 돈을 버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 악마가 넘쳐나는 시대에 악마를 죽이는 업 또한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덴지가 벌이가 좋아 직업을 선택한 건 아니다. 부모가 남긴 빚을 이어받고 어찌할 수 없어 택한 게 이 길이다. 간신히 이자만 까고 버텨내는 삶이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 가운데 가진 건 악과 깡, 그리고 포치타 뿐인 채로 던져지는 덴지다.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다. 생활고로 안구 한 쪽과 신장 하나, 고환 한 쪽을 헐값에 팔아야만 했지만 말이다.
 
지붕만 있으면 집이 되고 잼도 바르지 못한 식빵을 씹는 삶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덴지는 그럭저럭 버텨나간다. 악마 치고는 어딘지 귀여운 구석이 있는 포치타와 함께 자족하는 삶을 살아나간다. 행복이란 부와 관계없이 관계에서 온다는 현대 과학의 여러 연구들이 이 정도 처절한 삶까지 적용될 수 있는가 싶어질 정도.

하급 악마들을 잡으며,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장기를 팔아 버티던 덴지의 삶은 한순간에 뒤바뀐다. 저를 데블헌터로 고용한 사채업자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사채업자는 능력을 얻기 위해 악마와 계약하려다 좀비가 되어버린 상태, 제 부하들까지 죄다 좀비로 만들고는 덴지까지 악마 앞에 유인한다. 수많은 좀비에 포위된 덴지는 포치타와 함께 어떻게든 버텨보려 발버둥치지만 끝내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체인소 맨 스틸컷

▲ 체인소 맨 스틸컷 ⓒ 일본 TV도쿄

 
그저 애들 만화가 아니라고
 
그러나 덴지 곁에 있는 포치타가 힘을 발한 덕택에 덴지는 악마와 결합한 반인반마의 형태로 부활한다. 전례 없는 반인반마, 다른 마인들과는 달리 평소엔 인간이지만 심장에 연결된 줄을 잡아당기면 전기톱이 얼굴과 양 팔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악마들처럼 피를 삼키면 상처가 회복되고 힘이 나는 능력도 갖게 된다. 이 같은 능력을 알아본 공안 간부 마키마에게 발탁돼 공안 소속 데블헌터로 활동하게 되는 것이 <체인소 맨> 첫 시리즈의 출발이 된다. 말하자면 '체인소 맨' 덴지의 탄생, '체인소 맨' 비긴즈인 것이다.
 
얼핏 애들 만화 같아 보이는 이 작품의 설정을 줄줄 풀어놓은 것은 이 작품이 그저 애들만화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이 작품을 추천한 벗들이 말한 대로 <체인소 맨>엔 이 시대 절단된 청춘의 욕망이며 가혹한 현실에의 은유 따위가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사랑, 관계, 연애에 대한 것이다.
 
극중 덴지는 수차례 제 기본적 상황을 되짚는다. 흔히 의식주라 불리는 기본적 조건들, 또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기본적 욕구를 말이다. 공안 소속이 되기 전, 덴지는 제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도 인간의 기본을 충족 받지 못한다. 부모 없이 빚에 허덕이는 소년에게 도쿄의 집값은, 그럴듯한 의복은, 맛있는 음식은 닿기 어려운 것이다. 쓰레기를 뒤져 연명하고 아무 데나 누워 자는 때가 그는 얼마나 많았는가. 상황이 이러하니 여자란 아예 포기하고 돌아볼 수 없는 존재다. 포기가 차라리 저를 보호한단 것을 덴지는 일찌감치 깨달은 터다.
 
마침내 공안 소속 데블헌터가 되어 삶의 기본적 조건을 갖추게 된 덴지다. 그러나 그에게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여전히 있으니 다름 아닌 이성이다. 이성과의 관계, 또 풀리지 않는 성욕이 수시로 덴지에게 갈증으로 작용한다. 여성을 탐하고 싶다는 욕구, 그를 갈망하는 마음이 수시로 분출한다. 이성을 잃고 싸울 때조차 예쁜 여성만큼은 살려주는 모습이 그의 사연을 아는 이에겐 그저 웃기거나 부도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체인소 맨 스틸컷

▲ 체인소 맨 스틸컷 ⓒ 일본 TV도쿄

 
한국, 일본에서 꺾여나가는 청춘들
 
그런 그가 조금씩 이성과 관계 맺는 법을 깨우쳐가는 과정을 <체인소 맨>은 공을 들여 다룬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마와 전기톱으로 변신해 그를 제압하는 이 무지막지한 설정의 애니메이션이 일찌감치 포기하고 단절되어 왜곡되어가는 욕구를 세심히 어루만지는 모습이 놀랍다. 우리가 사는 세상 가운데, 그 팍팍한 현실 속에서 제 자연스런 욕구를 억압한 청년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뿔 달린 악마는 아니라도 저의 일상을 해하려 드는 온갖 존재들 앞에서 겨우 의식주를 간신히 보전하는, 그리하여 그 이상의 욕구를 감히 꿈꾸지 못하는 청춘을 나는 얼마나 자주 접해왔던가.
 
그로부터 세련된 외양이며, 능숙한 솜씨를 갖지 못한 투박한 사내가 되고, 여성들로부터 연애며 결혼의 대상으로 고려되지 못하는 소위 루저, 또 베타메일이라 자조하는 이들을 나는 무척 많이 보아왔던 것이다.
 
2022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발표한 '청년의 연애, 결혼, 그리고 성 인식' 연구는 만19세부터 34세의 청년 가운데 70% 가량이 연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여러 기관의 비슷한 조사들 또한 얼마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리킨다. 저출산 이전에 혼인의 어려움이, 그 전에 연애에의 난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결과다. 비혼이 아니라 혼인불가, 비연애가 아니라 연애불가의 청춘이 이중 얼마를 차지할까.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테다.
 
일본에서, 또 한국에서 꺾여나가는 청춘의 열망과 욕망들을 생각한다. 전기톱으로 변해서라도 다 썰어버릴 수 있는 세상은 저기 만화 속에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불안 가운데 흔들리며 의식주를, 약간의 본능적 욕구를 채워나가며 버티고 있다. 모두가 외면하는 절망의 언덕이다. 희망은 대체 어디서 구하여야 하는가.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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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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