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6년간 기자로 일하며 많은 속기록을 봤다. 속기란 말을 글로 풀어쓰는 것으로, 국회와 지방의회, 법원과 정부 부처 회의 등을 문서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음성을 다시 듣는 것보다 글로 풀어 찾아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속기는 널리 쓰인다. 
 
녹취를 풀어 속기록을 만들고 이것이 녹음본과 같다는 것을 인증하는 게 녹취공증이다. 국가기술자격인 속기자격증을 취득해 속기사가 되는데, 크게 위에 적은 기관에 속해 근무하는 이들과 그때그때 일감을 받아 처리하는 민간 속기사로 구분할 수 있다. 민간 속기사의 주요 일감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소송 상황에서 법적 증거로 쓰이는 녹취를 풀어 공증하는 것이다. 녹취와 속기록이 동일하다는 녹취공증을 해 수사기관이며 판사가 이를 효과적으로 확인토록 하는 게 이들이 업이다.
 
요즘에야 녹음을 풀어내는 걸 인공지능(AI)이 할 수 있다지만, 아직 법적 효력이 있기에 속기는 인간의 영역에 속한다. 모든 녹음이 잡음이 차단된 공간에서 듣기 좋게 이뤄지지 않고, 인간이 주의력을 기울여야 겨우 알아챌 수 있을 때도 많기 때문이다.
 
 '나를 들어줘' 스틸컷

'나를 들어줘' 스틸컷 ⓒ BIFAN

 
여성 재택 속기사, 그녀에게 벌어진 일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엑스라지11에 속해 상영된 작품 <나를 들어줘>는 속기사 은우의 이야기다. 소송에서 쓰이는 녹취록을 듣고 문서로 옮기는 작업이 꼭 일터에 나갈 필요가 없다 보니 은우 역시 다른 속기사들처럼 재택으로 근무한다. 회사에서 녹음파일을 받아 조용한 집에서 듣고 활자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은우에겐 나름의 의식이랄까, 그런 것이 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귀를 정결하게 씻어내는 작업이다. 귀를 청결히 하는 게 지나쳤던 것일까. 귀에 염증이 올라 면포를 덧씌워야 할 지경이 된다. 그러나 마냥 일을 미룰 수도 없는 노릇, 쌓여가는 일감에 면포 위에 헤드폰을 덮고 녹취를 풀기 시작한다.
 
사실 소송에 쓰이는 녹취를 푸는 건 피로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소송이란 사람들의 갈등이 있다는 뜻이고, 그에 쓰이는 증거 역시 듣기에 좋지 않은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은우가 들어야 할 녹취 또한 마찬가지다. 이번 일감엔 남녀 간의 심각한 다툼이 담겼다. 그저 말싸움을 넘어서는 다툼, 데이트폭력이 의심되는 사안이다.
  
 '나를 들어줘' 스틸컷

'나를 들어줘' 스틸컷 ⓒ BIFAN

 
낯선 단편에서 느낀 익숙한 문학의 인상
 
<나를 들어줘>는 단국대학교 공연영화학부를 졸업하고 영화 연출과 연기를 병행하는 공현지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12분짜리 짧은 극영화임에도 속기사라는 많은 이에게 낯선 직업을 주요하게 다뤄 영화 안에 특별한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일감을 서둘러 처리해야 하는 주인공 은우와 옆집에서 들려오는 짜증스런 소리가 절묘하게 얽혀든다. 극적 긴장이 고조되는 사이 여성과 여성, 또 다른 여성 사이의 연대가 은근히 이어진다. 지난 십수 년간 한국 문단을 지배했다 해도 좋을 비주류 여성 간의 연대, 최은영 등이 대표하는 일련의 작품군을 마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처음 영화 속 은우는 그저 녹취를 푸는 데만 집중한다. 녹취 바깥의 모든 소리는 그녀의 업에 방해가 될 뿐이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쿵쿵대는 소리가 짜증이 난 은우는 옆집 문 앞에다 '조용히 해달라'는 내용을 적은 메모를 붙여놓고 돌아오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은우의 일상 가운데 옆집의 존재가 달리 다가든다. 경찰의 방문을 통해서다. 은우의 집 문을 두드린 경찰은 옆집에 사는 여자가 실종된 것 같다는 말을 전한다. 신참인 듯 보이는 경찰관은 혹여 여자가 집에 들어오게 되면 전화 한 통을 해달라는 당부를 간곡히 남긴다. 말을 듣고 나니 무언가 마음에 켕기는 은우다.
 
 '나를 들어줘' 스틸컷

'나를 들어줘' 스틸컷 ⓒ BIFAN

 
옆방 여자의 존재가 마음에 걸린다
 
곧이어 은우는 전날 들었던 녹취를 다시 듣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전날엔 녹취 속 다툼인 줄 알았던 대화가 녹취 안에 없는 것이다. 녹취 안에 담기지 않은 폭력적인 말들이 전날 밤 자신이 푼 녹취록 안에 들어 있다. 그렇다면 그건 옆방에서 들려온 것이 아닌가. 그 대사는 좀처럼 그냥 넘기기엔 심각해 보이는 것이다. 은우는 집을 나가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옆집 창문턱에 몰래 녹음기를 틀어 올려두기까지 한다.
 
은우의 반대쪽 옆집에 사는 할머니도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나이가 들고 거동이 불편해 보조기를 밀고 다니는 그녀다. 그런 그녀가 은우의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모양이다. 귀가 불편한 은우가 잠시 스피커로 녹취를 틀어 녹취록을 풀었는데, 그 과정에서 녹취 속 남녀의 다툼이 그대로 옆방에 흘러 나갔던 모양이다. 걱정이 된 할머니가 은우에게 다가서 그녀의 안전을 묻고, 혹여 그런 일이 더 있다면 제 집으로 건너오라 말하는 장면이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말하자면 영화는 여성과 여성 사이 미약한 연대에 주목한다. 영화가 그리는 이 여성들의 연대 바깥은 냉정하고 무심하기 그지없다. 경찰은 그저 한 통의 전화에 실종신고가 됐던 여성의 안전을 직접 확인할 의무가 없다며 물러서고, 또 다른 사내들이란 녹취록 속에서, 옆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도 여성을 겁박하고 폭행할 뿐이다. 죄다 하나 같이 못되고 폭력적이며 파괴적인 인간들뿐이다. 여성들은 그 속에서 아주 희미한 연대로써 서로를 지키려 하니, 이 영화가 비추려 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 BIFAN

 
범람하는 폭력, 무너진 공동체... 여성의 불안
 
영화가 아닌 소설 가운데선 이와 같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작품이 수두룩하다 해도 좋겠다. 가장 유명한 작가인 최은영 외에도 김혜나, 최유안, 황모과 작가 등의 작품이 한국 문단의 중심에 있다. 여성들의 연대와 성장이 여성 독자가 주류인 문학에서 선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영화에선 이와 같은 작품이 그리 많다고 하기 어렵다. <나를 들어줘>가 서사로서는 전혀 새롭지 않음에도 진부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이는 이와 같은 영화가 지닌 가치를 관객에게 실감하게 한다. 문학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영화는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 앞에 직접 보이고 느끼도록 하는 생생함을 영화는 빚어낼 수 있는 것이다.
 
경찰들이 찾아와 은우의 집 문을 두드리는 순간의 불편한 긴장이 대표적이다. 그들이 경찰이라 말하지만 은우는 쉽게 문을 활짝 열어젖히지 못한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여성으로서 느끼는 두려움이 그저 피해망상적 무엇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많은 뉴스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수많은 여성 대상 범죄와 데이트 폭력 등이 벌어지는 현실, 이에 더해 파편화된 공동체가 낳는 불안이 그저 그를 사실적으로 비추는 것만으로도 영화적 긴장으로 효과적으로 전환된다. <나를 들어줘>가 거둔 유효한 성취가 있다면 대부분은 현실의 영화적 반영,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테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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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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