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나를 만들 때> 포스터
<신이 나를 만들 때> 포스터안정인
 
한때 '신이 OOO를 만들 때'라는 말이 밈으로 인터넷상에 떠돈 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신이 가수 윤하를 만들 때 가창력과 귀여움을 한 스푼씩 넣고, 개념도 첨가했는데 마지막으로 키를 담은 그릇을 엎어버려 미처 넣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완벽하지만 키가 작은 가수 윤하에 대한 유머 섞인 팬심이 느껴진다. 한때 이런 식의 밈이 끝도 없이 만들어졌다. 신이 강동원을 만들었을 때, 신이 전지현을 만들었을 때 기타 등등.   이런 밈을 본 사람은 한 번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신이 나를 만들 때 뭘 넣고, 뭘 넣지 않은 것이지?"(나로 말하자면 '소심함' 한 스푼과 '게으름' 두 스푼, '똘끼' 한 스푼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당신은?)

그러니까 이 뮤지컬은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킥킥 웃고 지나가 버릴 수 있는 생각을 소재로 삼았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이니 당연히 신도 그 안에 살고 있다. 신은 클라우드의 창조 드라이브 안에서 인간을 제조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뮤지컬은 적합하지 않다. 적어도 '클라우드'와 '파일', '삭제', '바이러스' 같은 기초적인 인터넷 용어 정도는 알아야 한다. 자, 기본 용어를 알고 있다면 혹시 신이 당신에게 넣었을지 모를 '진지함'을 극장 밖에 놓아두자. 이제 입장할 준비가 끝났다.

불이 켜지면 신이 등장한다. <파우스트>의 신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종교와 관련 있는 신도 금물이다. 매일 정해진 할당량을 채워야 하지만 그 일에서 보람은 느끼지 못하는, 조제 비율을 바꿀 수는 있지만 그래봐야 사용할 수 있는 재료의 양은 정해져 있는 피곤한 신을 떠올려야 한다. 그의 작업실에는 모니터인지 장식장인지 모를 상자들이 떠 있다. 화면에 파일 표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문을 열면 생명수가 담긴 유리병이 들어있는 식이다.

지금 신은 커다란 그릇을 앞에 두고 누군가를 제조하는 중이다. 재력 두 스푼과 체력 한 스푼, 미모 한 스푼을 넣어준 뒤 금수저는 덤으로 던져 넣는다. 와우, 나도. 나도 그런 것 좀 주세요. 지금은 늦었다고요? 일단 주기나 해봐요. 어떻게든 흡수해 볼 테니까.

신이 한참 제조에 열중하고 있을 때 악상이 쳐들어온다. 온갖 불행으로 점철되었던 자신의 인생에 딱 한 번의 행운이 찾아온 날, 즉 로또 맞은 날 사고로 죽은 악상은 신에게 소리를 지른다.

"인생이 너무 불공평했어. 억울한 내 삶. 환불해 내."

신은 어이가 없다. 어차피 나한테 공짜로 받은 인생이면서 무슨 환불? 인생이란 무릇 남의 뜻대로 왔다가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남의 뜻대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진다. 이 녀석을 만들 때 내가 뭘 넣었더라? 어이쿠, 이 녀석에게 주어야 할 것을 다른 곳에 써 버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기억으로만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눈치 없는 컴퓨터가 떠들어대기 시작한다. 증거를 잡은 악상은 신을 협박한다. 위협한다. 신은 악상을 달래기 시작한다. 50년만 있으면 원래 너에게 주려 했던 것을 가지고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신과 악상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최대한 감정을 누르며 말하자면 인생은 불공평하다. 지금만 그런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아마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거 사람들을 옭아맸던 '윤회'란 그 불공평함을 개인 탓으로 돌리기 위한 방편이다. 과거의 업이 지금의 불공평함으로 나타난다니 한숨만 나온다. 누구는 아인슈타인의 머리와 슈퍼 모델의 워킹, 탑 배우의 얼굴과 재벌 3세의 재력을 갖기 싫어 못 가진 것인가? 누구는 태어나보니 왕자나 공주이고 싶지 않아 이렇게 태어났단 말인가. 그런 것들을 못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화가 나는데 그게 또 내 탓이라고? 윤회 같은 것에 비하면 <신이 나를 만들었을 때>의 자세는 훨씬 밝고 유머러스하다. 자, 인생이 불공평한 것은 알겠고, 그래서 뭐! 하는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건강하다.
 
신이 나를 만들 때 TODAY's CAST
신이 나를 만들 때TODAY's CAST안정인
 
이 뮤지컬은 이번에 처음으로 무대 위에 올려진 작품이다. 스토리는 낯설지 않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들이 연속해서 등장한다. 신은 관객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며 무대 밖으로 나가버리고, 라이벌인 악상과 호상은 <데스노트>의 한 장면처럼 LED코트 안에서 테니스를 친다.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소림사 운동장을 누비는 주성치처럼 악상은 무대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고 관객석에서 무대를 훔쳐보기도 한다. 유쾌하고 발랄하다.

팝스타일의 음악은 한 번 들으면 곧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중독성이 있다. 무대 위에서 직접 연주하는 밴드의 소리가 더해지면 한껏 흥이 차오른다. 당신이 중독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도 할 수 없다. 관객들은 배우의 손짓에 따라 떼창을 불러야 한다. 이러니 즐거울 수밖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반드시 그 곡을 흥얼거리게 될 것이다.

'신' 역의 정다희 배우는 힘있는 가창력과 관객들을 쥐락펴락하는 매력으로 무대를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열심히 노래하다 뭐 하나쯤 빼고 악상이를 만들었다니 용서하겠어 라는 마음이 된다. 소극장 무대가 좁다는 듯이 관객석과 통로를 달리며 노래하던 '악상' 역의 임진섭 배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무대 위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할머니가 아니었을까 싶은 '영' 역의 전혜주 배우와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던 '호상' 역의 심수영 배우의 파이팅에 감사한다. 오랜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킥킥거리고 낄낄거리는 시간이었다.

인생은 불공평한 데다 예측할 수도 없다. 불안하고 답답하고 진지한 마음이 될수록 유머와 웃음이 필요하다. 연예인들의 전망 좋은 집자랑은 늘어만 가고 물가는 올라만 가고 제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내 월급뿐이다. 지구 이곳저곳에서는 전쟁이 진행 중이고 자고 깨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덮인 뉴스가 기다리고 있다. 이래서야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 이럴 때 유머가 없다면 무엇으로 버텨야 할까. 110분의 시간을 귀여운 유머로 채우고 싶은 관객은 6월 11일까지 예그린 씨어터를 찾으면 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지안의 브런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신이나를만들때 뮤지컬 대학로 연극열전 예그린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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