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인피니트 에이크 포스터안정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4월의 어느 해맑은 아침,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라는 긴 제목의 단편 소설이 있다.
18세의 소년과 16세의 소녀가 우연히 만난다. 두 사람은 즉시 서로가 100퍼센트의 상대임을 알아본다. 그러나 아직 어렸던 두 사람은 이 우주적인 기적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
"우리가 정말 100퍼센트의 연인이라면, 반드시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두 사람은 헤어졌고 각자 다른 곳에서 살다 질병을 앓은 후 기억을 잃어버린다.
14년이 지나 남자가 32살, 여자가 30살이던 4월의 어느 아침,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마주친다. 둘은 서로가 100퍼센트의 상대임을 즉시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미 30대에 접어든 두 사람은 10대 때처럼 쉽사리 상대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주저한다.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지? 망설인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고 만다는 내용이다.
책을 덮은 후 내용과는 조금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만약 일이 잘 풀려 두 사람이 결혼했다면 이들은 계속 사랑했을까? 영원히 행복했을까? 아픈 아기를 돌보느라 밤샌 새벽 정신없이 자고 있는 상대를 볼 때, 바쁜 출근길 쌓여 있는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못 본 척 지나가 버리는 상대를 볼 때, 상대방의 가족이 던진 말에 상처받은 식사 자리에서 그 사랑은 빛나고 있을까?
이 연극 <인피니트 에이크>에서 필리핀인과 중국인 부모를 둔 미국 여자 호프는 유대인계 미국 남자 찰리에게 말한다. 어렸을 때 그녀의 할머니가 해줬다는 이야기다.
"태어날 때 신은 운명의 상대인 아이들의 발목에 붉은 실을 묶어 둔대. 살면서 끈에 묶인 아이들이 점점 가까워지는 거지. 그러다 딱 만나는 거야. 운명적인 사랑이란 그런 거야. 하지만 우린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운명의 사랑이든 100퍼센트의 사랑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누군가를 만난다. 사랑에 빠진다. 물론 누군가는 더 빨리 그 사랑에 빠지고, 상대방은 천천히 그것을 느낀다. 이 연극 속에서 먼저 뛰어드는 쪽은 찰리다.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당황하고 버벅댄다. 두통을 느낀 호프가 말한다.
"잠깐만 눈을 붙일게. 1시간 후에 깨워 줄래?"
찰리는 협탁 위 붉은 시계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검은 디지털시계를 내려놓는다. 한 시간은 하루가 되고 일 년이 되고 어쩌면 평생이 된다. 이 연극의 주인공 호프와 찰리의 이야기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침대가 놓여 있다. 찰리 말에 의하면 '온 가족이 그 위에서 잉태된' 곳이다. 침대 옆에는 스탠드와 전화기, 시계가 놓인 탁자가 있고 티브이와 옷장, 화장대가 있다. 이곳은 찰리의 원룸이었다가 두 사람의 침실이 된다. 변화 없는 무대 같지만 센스 있게 바뀌는 조명이 이들의 마음을 풍부하게 표현한다. 그렇게 60년의 시간이 지나간다.
100분의 연극에 60년의 시간을 응축시키는 일은 만만치 않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종이마다 조금씩 다른 그림을 그린 후 빠르게 넘기며 움직이는 효과를 얻게 되는 플립북처럼 지나간다. 그러니 혹시 두 사람의 인생 전체를 들여다보는 일이 지겹고 지난한 일이 될 것이란 걱정은 접어두는 것이 좋다. 이들의 일생은 어색한 찰리의 탭댄스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타인의 연애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들의 대화에 낄낄거리거나 킥킥대느라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세대 별로 웃음 포인트도 다르다. 이건 좀 놀라운 경험이다.
극의 시간은 대화들과 이들이 바꿔 입고 나오는 옷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젊은 배우들은 나이 든 배우로 대체된다. 60년의 시간을 젊은 배우들이 묘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런 변화 때문에 몰입이 깨진다. 다른 커플을 보는 느낌이 된다. 젊은 배우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호프 역의 권재은 배우와 찰리 역의 허진 배우는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는데 말이다. 아쉽다.
60년의 시간이 마무리된 후 젊은 커플이 무대로 돌아온다. 호프는 침대에서 눈을 뜬다. 찰리는 어디선가 찾아온 붉은 시계를 내려놓는다. 관객의 마음에 따라 이 장면은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관객이 지켜본 것이 이들의 인생인지, "이 모든 것을 건너뛰고 우리가 함께 늙어서 현관에 앉아 손주들이 그네에서 노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을까?"라고 원했던 찰리의 말처럼 상상인지. 반드시 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어차피 나와 비슷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인생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 작품의 작가인 데이비드 슐너(David Schulner)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위기의 주부들>이나 <뉴 암스테르담>같은 유명한 미드의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도대체 몇 살 때 60년을 관통하는 한 커플의 이야기를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1974년생인 작가(아주 정확한 정보는 아니다)가 2003년에 발표한 것이 이 작품이라니 아마 30세 근방에 쓴 것인 듯하다. 사랑에 관한 환상이 완전히 깨지기에는 좀 이른 나이다. 덕분에 이 연극은 따스하고 아련하다.
이 연극의 영어 제목 < An Infinite Ache >, 우리말로 하면 <무한한 고통> 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제목은 칠레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파블로 네루다(Pabli Neruda)의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한 여자의 육체>라고 소개된 시다. 읽어 보면 단순히 남녀 간의 섹스를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두 사람의 사랑의 변화를 묘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중의적인 시다.
마지막 구절에서 시인은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Cuerpo de mujer m´a, persistire´ en tu gracia)"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원하는 갈증으로 "피로가 흐르며 무한한 고통(y la fatiga sigue, y el dolor infinito) 속에 살 것이라고 예언한다. 'El dolor infinito', 영어로 번역하면 'An Infinite Ache', 즉 끝나지 않는 고통이다.
찰리와 호프는 사랑을 시작했다. 운명의 상대라고 딱히 믿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삶은 또 다른 세계다. 오늘도 따스한 봄을 맞아 거리에는 연인들이 넘칠 것이다. 이번 달에만 청첩장을 석 장이나 받았다. 이 모든 커플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이 연극은 4월 23일까지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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