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만선  명동예술극장 전시 포스터
연극 만선 명동예술극장 전시 포스터국립극단
 
무대는 경사져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 같다. 무대 위쪽으로 길이 나 있고, 아래쪽에 널로 지붕을 얹은 다 쓰러져가는 집이 보인다. 용케도 문이 열린다 싶을 정도로 무너져 내렸다. 무대 가운데에는 그물과 어구들이 뒹굴고 뒤쪽에는 작은 깃발들이 휘날린다. 가난하고 퇴락한 남쪽 어느 어촌의 모습이다. 

연극은 요란한 굿으로 시작한다. 무당의 소리에 맞춰 손을 비비는 아낙들의 옷차림을 보자면 1950년대 혹은 1960년대의 풍경 같다. 지저분하고 누더기진 옷을 입은 아낙들 사이에 흰 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노인이 지팡이를 집은 채 꼿꼿이 서 있다. 동네 사람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본다. 그는 풍어와 만선을 빈 무당에게 넉넉한 돈으로 인심을 쓴다. 곰치가 배를 빌리고 있는 선주 임제순이다. 

부유하고 악랄한 선주와 능력 있지만 가난한 어부. 맑은 날과 비바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고기 모는 기술을 가진 아버지와 세상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아들. 이런 구조 속에 인물들을 던져 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팔뚝만 하고 허벅지만 한 부서 떼가 몰려든 어느 날. 중선배를 타는 곰치는 귀신처럼 물고기들의 방향을 알아채 길을 막고 떼를 몰아 배가 터지도록 부서를 잡아들인다. 

만선이란 곰치와 그의 가족에게 찬란한 희망이다. 그 희망으로 채우려는 가족들의 욕망은 오히려 작고 하찮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배 빌린 돈을 갚는 것이다. 바다에 빠져 죽지 않고 무사히 살아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연극 <만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비극의 구조를 충실하게 따른다. 

주인공은 아마도 '곰치'다. 그의 아내 구포댁의 설명에 따르면 "복쟁이 새끼 잡어 묵음시로 곰곰하는 눈 툭 불거진 고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름은 아무렇게나 따 왔지만 곰치의 물고기 잡는 솜씨는 예사롭지 않다. 곰치가 바다에 나가 "맷돌질"을 하지 않았다면 부서 떼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곰치의 주장만이 아니다. 동네 사람 모두 인정하는 바다. 즉 곰치는 우리와 비슷하지만 능력과 재능이 출중한 인간이다. 

만선의 기쁨을 느끼는 것도 잠시, 곰치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에 부딪힌다. 선주 임제순은 곰치가 잡아 올린 물고기를 말도 안 되는 값으로 후려쳐 가져가 버린다. 여기에 더해 밀린 임차료 이만 원을 당장 갚지 않으면 배를 빼앗겠다고 통보한다. 임제순과 함께 나타나는 또 다른 선주 범쇠는 딸 슬슬이를 자신의 네 번째 후처로 내주면 돈 이만 원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제안한다. 

몰려든 부서 떼로 이웃의 다른 배들이 몇 번이고 만선의 기쁨을 느끼는 동안 곰치는 안절부절못한다. 만선을 알리는 징소리가 들릴 때마다 전전긍긍한다. 속이 타서 어쩔 줄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다시 계약서를 쓰고 배를 빌린다. 때마침 바다에는 앞바람이 불어온다. 

곰치는 쌍돛을 단다. 먼바다까지 배를 몰아 팔뚝만 한 부서들을 깡그리 긁어 올 셈이었다. 곰치의 고집 때문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상황이 그를 부추겼다. 당연히 그 결과는 비극이다.

잠깐만, 그렇다면 관객들은 곰치라는 인물에 감정이입 되어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하는 것인가? 이 연극은 천승세 작가가 1964년에 쓴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60년 전 이야기다. 60년 전의 관객에게 곰치가 '이해할 만한 캐릭터'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관객들에게는 감정이입이 쉽지 않다. 2023년의 곰치는 또 하나의 모순된 사회 구조 중 하나일 뿐이다. 그제야 다른 주인공들의 모습이 보인다. 

곰치는 말하자면 심각한 꼰대다. 아들 도삼이 집안 사정에 맞는 방법을 강구하자는 말에 곰치는 이렇게 응수한다. 

"뱃놈이 그런 소리 하면 못써. 고게를 많이 잡고 적게 잡는 것도 다 운이여. 지랄 났다고 비행기가 뜨고 말고를 해. 그놈의 비행기는 뭣에다가 쓰는 것이여."

아들에게 큰 소리를 치는 곰치는 갑질하는 선주와 딸을 팔라는 범쇠에게만은 고분고분하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선주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아무 소리 말어. 다들 입을 봉해."

범쇠를 내버려둘 것이냐는 연철의 울부짖음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소리하면 못써. 저 놈 욕심이 그런 거을 믄 죄 지었다고 죽여? 내버려 둬!"

곰치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구조를 고스란히 채화한 인물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구조로 다른 주인공 위에 군림한다. 

이런 구조에 반항하며 어떻게든 바꾸려 노력하는 것은 구포댁과 슬슬이다. 이들은 곰치와 다르다. 아들 셋을 이미 물에서 잃었고, 남은 아들 도삼 마저 잃은 후 구포댁은 젖먹이인 남은 아들에게 눈을 돌린다. 10살만 되면 그물 손질을 시키겠다는 남편을 피해 아들을 지킨다. 슬슬이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힘껏 운명과 싸우다 비극적으로 스러진다. 

비극의 질이 두터운 만큼 그것을 표현하는 무대 효과도 극적이다. 극의 후반부 무대 위에 쏟아지는 폭우와 천둥번개는 정신이 번쩍 들만큼 멋있다. 사투리가 어색하기는 배우나 관객이나 마찬가지다. 사투리로 진행되는 대사는 감정이 고조될수록 표준어에 가까워진다. 공연 초반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자연인이 아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태어나 보니 이미 만들어져 있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허우적댄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것인지 어렵고 상처 입더라도 깨고 부수고 고쳐 나갈 것인지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연극 속 인물들과 함께 고민에 빠지고 싶다면, 4월 9일까지 명동예술극장을 찾으면 된다.
덧붙이는 글 이글은 지안의 브런치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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