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티드 스토리즈 포스터아트리버
불이 켜지면 책상에 앉아 있는 나이 든 여자가 보인다. 단편소설 작가로 유명한 '루스 스타이너'다. 원고를 읽고 거기에 뭔가를 적어 넣으며 집중하고 있다. 벨소리가 들린다. 문을 여는 대신 루스는 책상 서랍에서 열쇠를 찾아 창문으로 간다. 현관문이 고장 났기 때문에 집에 들어오려는 방문자는 그녀가 던져주는 열쇠로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한다.
마치 루스의 마음 같다. 그녀의 마음에 들어오려는 사람은 루스가 만들어 놓은 특별한 방법 (예를 들어 대학원 수업)을 이용해 현관문처럼 그녀를 지키고 있는 딱딱한 껍데기("농담을 좀 하고 못하는 말이 없는 쌈닭 같은 여자")를 뚫어야 한다. 대학원생 리사 모리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연극의 무대는 루스가 31년째 살고 있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아파트 거실 딱 한 곳이다. 출연진은 두 명이다. 50대의 루스와 20대의 리사. 두 배우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6년의 시간을 연기한다. 시간의 흐름은 두 명의 배우가 열심히 갈아입는 옷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26살의 대학원생 리사 모리슨은 루스를 경배하고 있다. 루스의 작품집을 다 읽었고, 거기에 실리지 못한, 잡지에 한 번 선보인 후 사라진 소설들까지 전부 알고 있다. 리사의 입에서는 루스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 줄줄줄줄 흘러나온다. "회의부터 병원 예약까지 스케줄 관리하는, 늙은 여자 수발드는" 조교일을 자청할 정도다. 그런 리사에게 루스는 '글을 쓰라'고 말한다.
"좋은 글인 게 중요한 거지. 그게 어디서 나온 얘기인지는 상관없어."
젊은 작가 지망생에게 이야기의 소재란 자신과 그 주변에 관한 것뿐이다. 그 소재 중 하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지만 상처를 줄까 봐 걱정하는 제자에게 스승이 말한다.
"친아버지라 할지라도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해. 초점을 맞추고 쭉 나가는 거야."
확신에 찬 가르침은 제자에게 힘이 된다. 쓰고 쓰고 쓴다.
그 사이 두 사람의 관계도 변한다. 유명한 작가와 경배자에서 교수와 조교로, 스승과 제자로, 친구로 가족으로 변한다. 6년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상대가 된다.
단편소설집이 출판되고 주목을 받는다. 성공이다. 제자는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 소재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고 알려줬던 스승의 감춰져 있던 연애 이야기다.
이 연극 <컬렉티드 스토리즈(Collected Stories)>는 미국 작가인 도널드 마굴리스(Donald Margulies)가 1996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단편소설집' 정도가 되겠다. 시대적 혹은 사회적 배경에 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한 작품은 아니지만 혹시 1990년대가 '옛날'처럼 느껴지는 분들이 있다면 극 중반 우디앨런(Woody Allen)과 순이 프레빈(Soon Yi Previn)에 관해 배우들이 토론하는 장면에서 살짝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다.
미국의 유대인 영화감독, 배우, 코미디언, 연주자인 우디 앨런은 미아 패로(Mia Farrow )와 오랜 시간 동거를 하며 입양한 자식들을 키우고 있었다. 1990년대 초, 입양한 자식 중 하나이자 당시 10대를 갓 지난 순이 프레빈과 60을 바라보는 우디 앨런의 염문설이 터진다(둘은 결국 결혼했다). 우디 앨런이 서재에 숨겨뒀던 순이 프레빈의 누드 사진을 미아 패로가 발견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미국에서 엄청난 윤리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이 사건은 순이 프레빈이 한국계란 사실이 부각되며 우리나라에서도 꽤 회자되었다. 그리고 1996년에 발표된 이 연극에서도 소재로 활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