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이닝 노히트노런, 명예로운 불운의 주인공 배영수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뛰어난 투구를 보여준 투수는 배영수였다. 하지만 그가 거둔 성적은 단 1승도 없이 2패, 그리고 '10이닝 노히트노런'이라는 비공인의 '기억' 뿐이었다.
삼성 라이온즈
그 무렵 이미 현대그룹의 지배구조에 변동이 생기고, 유니콘스의 모기업 하이닉스의 자금난이 심화되면서 '돈싸움' 면에서는 이미 균형이 많이 무너져 있었다. 2000년 연고지 인천을 떠난 현대는 서울 진입 직전에 제동이 걸리며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 있었고, 그와 함께 신인 1차 지명의 기회를 봉쇄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투수코치 김시진과 타격코치 김용달을 중심으로 한 코칭스태프는 그동안 확보한 자원들을 부지런히 가공해내며 전력의 하락을 저지하고 있었고, 창단 이후 늘 라이온즈에 한 발 앞서 있던 유니콘스의 선수들 역시 여전히 강자의 여유를 지키고 있었다.
2004년, 삼성은 17승의 다승왕 배영수와 36세이브의 구원왕 임창용을 축 삼아 최강의 마운드를 구축하고 있었다. 거기에 1,2,3루수 골든글러버 양준혁-박종호-김한수가 내야를 지키고 있었고 역시 골든글러버 박한이가 중심에 선 외야진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에 맞선 현대는 8개 구단 최강의 스카우트진이 발굴해 온 16승의 외국인투수 피어리로 맞섰고, 34세이브로 구원 2위에 오른 조용준이 마무리를 책임지고 있었다. 야수진도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고의 유격수로 군림하던 박진만과 역시 그 해 도루왕이자 당대 최고의 중견수이기도 한 전준호가 내외야의 중심을 잡고 있었다. 타선의 핵은 그 해 타격, 장타율, 출루율 부문 1위에(볼넷 1위, 홈런, 안타 2위, 타점 3위) 오른 외국인 타자 브룸바였다.
삼성은 이승엽의 공백이 있었고, 외국인 선수들이 줄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현대도 심정수(28홈런)와 정민태(7승)와 김수경(11승)이 다소 부진하며 기대만큼을 채워주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의 권오준(11승)과 현대의 오재영(10승)이 떠올라 선배들의 빈틈을 채우며 신인왕 경쟁에 나선 것까지도 팽팽했다.
그 해 정규리그는 현대의 1.5경기차 우승으로 맺어졌다. 모든 면에서 팽팽하거나, 오히려 삼성 쪽이 우세한 양상이었지만, 승부처는 역시 맞대결이었다. 현대는 삼성을 만나 10승 7패 2무승부로 앞섰고, 딱 그만큼의 차이로 먼저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성은 플레이오프에서 3위팀 두산을 만나 3승 1패로 간단히 꺾으며 2001년의 아픈 기억을 설욕했고,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한 번 운명의 맞대결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린 것은 10월 21일이었다.
최후의 결전장, 2004년 한국시리즈
그 해 한국시리즈는 밤 10시 이후에는 새 이닝을 시작할 수 없다는 새로운 규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막강한 투수력과 그보다 더 치열한 자존심으로 맞서는 두 팀에게 밤 10시라는 제한은 너무 짧은 것이라는 점은 곧 현실에서 드러나게 된다.
1차전에서는 피어리와 배영수의 에이스 맞대결에서 현대가 먼저 승기를 잡으며 1승을 챙겼지만, 이튿날의 2차전은 8-8로 맞선 채 9회를 마치자 이미 제한시간을 넘기며 첫 무승부를 기록하게 됐다. 이어 대구로 옮겨 치러진 3차전을 삼성이 이겨 균형을 맞춘 뒤 4차전에서도 삼성의 배영수가 10이닝동안 무안타 무실점으로 버티고도 타선이 한 점을 만들지 못해 12회까지 0-0으로 맞서며 '비공인 10이닝 노히트노런'이라는 복잡한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어 5차전과 6차전을 다시 나누어 가진 뒤 10월 29일에 잠실에서 치러진 7차전마저 6-6으로 맞서며 세 번째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미 7전4승제의 마지막 일곱 번째 판까지 치렀지만 두 팀은 고작 2승씩만을 챙겼을 뿐이었고, 이제 시리즈는 도대체 몇 차전까지 이어지게 될지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결국 한국시리즈는 11월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두 팀은 새로이 시구자들을 섭외하는 부산을 떨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