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의 첫 번째 외국인선수들각 구단의 지명을 받은 선수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 쪽부터 조 스트롱(현대), 마이크 부시9한화), 더그 브래디(롯데), 마이클 앤더슨(LG), 숀 헤어(해태), 우즈(OB). 그 중 숀 헤어와 우즈는 나란히 역대 최악과 최고의 외국인선수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한국야구위원회
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프로야구가 '상품화된 야구'를 의미하는 한, 이미 돈 문제는 부차적인 게 아니다. 하지만 돈이 결정하는 승부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이들은 없다는 점이 난감한 문제들을 만든다. 비즈니스인 동시에 비즈니스가 아니어야 하고, 돈으로 움직여야 하는 동시에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것. 그것이 프로야구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딜레마다.
한국 프로야구가 그 딜레마를 정면으로 마주한 때는 1998년이었다. 그해 한국사회는 'IMF시대'의 첫해를 맞이했고, 프로야구 판에서도 8개 구단 중 2개가 모기업의 좌초 속에 선수라도 팔아야 버틸 수 있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특히 그 2개 구단 중 하나가 통산 9회 우승의 전설적인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였다는 점은 더 극단적인 비극을 연출하게 된다. 오직 돈 앞에 무릎 꿇은 최강자의 모습은 많은 프로야구팬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또 하나의 변수가 엎친 곳에 덮쳤는데, 그것은 외국인 선수에 대한 문호개방이었다. 팀당 두 명씩 영입할 수 있게 된 외국인 선수의 능력치는 절대적으로 그들의 몸값과, 그들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스카우트진의 능력과 노력에 달려있는 때문이었다. 그것을 최대한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팀들에게는 즉각적인 전력상승 기회가 주어졌고, 그럴 수 없었던 팀에게는 당연하게도 더 큰 상대적 박탈감이 남게 되었다.
야구판의 부익부 빈익빈 시대1997년 11월 3일부터 열흘간 미국 플로리다에서 한국프로야구의 외국인선수 선발을 위한 트라이아웃 캠프가 열렸다. 모두 160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류심사를 거쳐 메이저리그와 트리플A 경험이 있는 선수 위주로 58명이 공개훈련에 투입되었고, 세 차례 공식 연습경기를 통해 각 팀 스카우트의 낙점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중 21명은 투수였고, 5명의 포수를 포함해 야수가 37명이었다.
직전 3년간 합산 성적의 역순으로 전체 1번 지명권을 가진 현대가 대만 프로야구에서 5연속 완봉승 기록을 세웠던 강속구 투수 조 스트롱을 지명했고, 이어서 마이크 부시, 에드가 케세레스, 호세 파라, 주니어 펠릭스 등 메이저리그 경력의 선수들이 차례로 각 팀의 지명을 받고 계약을 맺었다. 대부분은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투수와 홈런을 칠 수 있는 야수들이었는데, 서양인 선수들에 대한 열등감과 기대감의 핵심이 '파워'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이 뛴 첫해였던 1998년, 한국프로야구의 판도를 결정지은 것은 외국인선수들이었다. 조 스트롱이 그럭저럭 마무리 역할을 하고 스캇 쿨바가 4번 타자로서 타점, 타율, 홈런에서 3,4,5위에 오르며 공격력의 중심을 잡아준 현대는 그 해 우승을 했고, 베이커와 파라가 각각 선발과 마무리로 15승과 19세이브를 올려준 삼성이 정규시즌 2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의 대박을 터뜨린 것은 2순위로 고른 타이론 우즈가 당장 42홈런을 터뜨려 장종훈의 기록을 넘어서며 외국인 최초의 MVP에 오르는 역사를 남긴 OB 베어스였다. 전년도 꼴찌였던 팀이 일약 4강권으로 발돋움한 것 역시 우즈의 힘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