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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새벽, 95세 아버지께 우리 부부의 여행계획을 말씀드렸다. 

"오늘, 여행 좀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언제?" 
"조금 후 출발해 내일 돌아오겠습니다." 
"어디로?" 
"사실은 올해 40주년 결혼기념으로 여수에 다녀오려고요." 


아버지는 적잖이 놀라는 기색이었다. 약간 섭섭함도 묻어있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정리하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군 시절 순천에서 근무할 때 여수 오동도로 자주 놀러 갔었지, 그때 동백꽃도 많이 봤지... 아범, 집 걱정 말고 잘 다녀와." 

그러면서 아버지는 "열차에서 음료를 사 먹으라"며 머리맡에 숨겨둔 작은 봉투에서 10만 원을 꺼내주셨다.
 
오동도 동백꽃
 오동도 동백꽃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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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계획은 연초에 세웠다. 결혼 40년을 맞아 아내에게 보답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다녀오라는 애들의 성화도 있었다. 

내가 미리 여행계획을 말씀드리지 않은 건 아버지가 한 걱정하실 것 같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매사 '조심하라'는 말을 달고 사신다. 

조심하라는 말은 내가 아버지에게도 자주 드리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여행계획을 사전에 알렸다면, 아버지는 그때부터 여행 떠나는 날까지 계속 걱정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꼬박 만 하루 집을 비우기에 아내가 아버지 드실 국과 찌개를 만들었다. 몇 가지 간편식과 약간의 과일도 식탁에 올려놨다. 

사실 속으로는 내가 더 애태우는 편이다. 한 두 끼 식사는 아버지 혼자서도 잘 챙기지만, 하루 이상 집을 비울 때는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다. 

속으론 걱정이 됐지만, 막상 집을 나설 때는 아버지께 조심하라거나 식사를 챙기라는 등 잔소리를 더 이상 하지 않고 평상시 외출할 때처럼 인사만 드렸다.
 
여수여행
 여수여행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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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여수행 KTX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달리면서 내는 바퀴소리와 차체의 미세한 흔들림에 사르르 눈이 감긴다. 이런 소소한 즐거운 시간이 얼마만인가. 나는 잠시 꿈속에 빠졌다. 

아내 말대로 결혼기념으로 여행만 한 추억이 없는 것 같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 그 기분으로 새롭게 충전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막내 자식을 앞세우고 32년 전 아내도 먼저 보냈다. 이후 아버지는 아내를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간간이 내색했지만 누구보다 굳건하게 사셨다. 

자식으로선 스스로 몸을 지키고 애쓰는 아버지가 고맙기만 하다. 새벽에 일어나면 '건강체조'를 하시고 정확한 시간에 식사를 하신다. 

아버지처럼 나도 늙고 싶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 참전 등 격변기를 거친 노쇠한 아버지가 인생을 반추하고 마무리하는 삶을 보면 경외감을 느끼곤 한다. 

사람 마음은 가족이 함께 할 때 풍요롭고 따뜻해진다. 내 나이 70이지만 아버지와 서로 의지하며 아버지 따라 늙고 싶을 때가 많다. 

여행하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안부전화를 드리지 않았다. 아버지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이는 아버지가 집에서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신호라 할 수 있다. 

아내도 가끔 집에 홀로 있는 아버지를 걱정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여행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내가 원하는 대로 여행 분위기에만 집중했다.
 
여수앞바다
 여수앞바다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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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바다 카페에서
 여수 바다 카페에서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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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친 뒤 드디어 집 도착, 1박 2일 만에 만나는 아버지는 이틀 여행인데도 오랜만에 상봉하는 것처럼 기뻐했다. 나는 "어제 늦게 밤에 왔습니다. 덕분에 여행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아버지는 "잘 다녀왔어? 연락하려다 일부러 안 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아버지 나름의 배려가 들어있다. 

이어 아버지는 "매끼 식사를 잘 했다. 경로당에도 다녀오고, 우중에 장까지 봤다"며 당신자랑(?)을 늘어놨다. 이 또한 자식 걱정을 덜어주려는 얘기다. 

우리는 누구나 늙으며, 어느 단계에서 노인이라는 인생을 거치게 된다. 그럼에도 노인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세태가 있는 걸 안다. 나는 그렇지 않다. 

아들인 나는 아버지로부터 지금도 삶의 경륜과 지혜를 배우고 있다. 95세 아버지는 여전히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여수 여행은 아버지가 건강하고 스스로 돌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아버지는 달력에 우리 여행을 '신혼여행'이라고 기록해 두었다. 아내와 나는 40주년 결혼기념을 아버지 표현대로 마치 신혼여행을 즐기듯, 여수 오동도에 만개한 동백꽃을 직관하고 해상케이블카를 신나게 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여수, #오동도, #동백꽃, #해상케이블카, #결혼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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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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