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카페, 온정" 스틸 이미지 현재 역 강길우 배우

▲ "식물카페, 온정" 스틸 이미지 현재 역 강길우 배우 ⓒ 매치컷


1. 한발 두발, 공감과 위로의 시간
 
<식물카페, 온정>은 제목과 동명의 공간에서 하루 동안 벌어질 법한 일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은, 통상적인 극장 개봉용으로는 짧은 편인 75분 분량의 장편영화다. 가게 주인과 세 팀의 손님, 그리고 각자를 상징하는 네 종류의 식물들을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첫 번째 손님 '서진'은 산세베리아 분갈이를 하러 가게에 들렀다. 본인은 원하진 않았지만 주위에서 바라던 인생 궤도를 위한 시험 준비로 5년간 고시원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고독한 시간 동안 친구가 선물해준 산세베리아 화분은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며 피폐해져가는 자신을 붙드는데 소중한 역할을 해줬다. 이제 5년간의 지난 과거를 털어내고 자신에게 맞는 진로를 찾아 새롭게 출발하려는 가운데 산세베리아에 대한 감사와 보살펴주지 못한 미안함을 품고 카페에 들렀다. 서진은 누군가에게 속내를 이야기하고 싶었고,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것을 카페 공간에서 발견하며 활짝 웃는다. 다시 들를 것을 기약하며 서진은 과거와의 작별을 완성한다.
 
두 번째 손님인 '진우'와 '인혁'은 주인 '현재'와 구면이다. 이들은 하트 모양으로 인기를 끄는 호야케리 둘이 포개진 화분을 가져와 봐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둘의 바람과 달리 크고 작은 호야케리 중 하나는 이미 살리기 힘들어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현재는 고심 끝에 판단을 내린다. 호야케리의 운명과 이 둘의 관계는 닮은꼴이다. 애써 회복하고 싶지만, 그러다간 더한 파국으로 치달을 상황이다. 현재는 선배로서 식물의 생존을 위해 최적의 판단을 내려줘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지언정 누군가가 조언해줘야 하는 책무를 그는 묵묵히 참을성 있게 수행한다. 둘을 떠나보낸 후, 현재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 회상하며 생각에 잠긴다.
 
세 번째 손님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후배인 '시내'다. 그녀는 현재에게 과거에 그가 찍은 사진집을 전해주러 왔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시내의 이야기와 현재의 과거가 함께 진행되며 가게 주인의 사연이 해설되는 장이기도 하다. 시내는 선배인 현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식물카페 온정을 열게 되었는지 궁금해 할 관객을 대신해 질문하고 답을 듣는 역할을 극중에서 수행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안정된 지금 삶에서 피로와 권태를 느끼는 중이기도 하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고민이 퍽 깊은 상태. 오랜 선배로서 현재는 그녀에게 싹을 틔우기 전에는 그녀로선 정체를 알 수 없는 씨앗을 선물하며 한번 잘 키워보라 당부한다.
 
2. 기시감: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일화
 
"식물카페, 온정" 스틸 이미지 서진 역 박수연 배우

▲ "식물카페, 온정" 스틸 이미지 서진 역 박수연 배우 ⓒ 매치컷

 
그런 현재에겐 유칼립투스에 얽힌 추억이 있다(유칼립투스는 세상에서 가장 크게 자라는 나무인 동시에 원산지인 호주에선 환경오염과 기상이변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시내와 그의 대화에서 마침내 관객은 카페 주인의 과거를 듣게 된다.

'현재'의 과거 회상을 들으면서 떠오른 것은 세계적인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일화다. 명성 높은 사진가 그룹 매그넘의 일원으로 세계 각지의 분쟁지대를 떠돌던 종군기자 살가도는 수많은 내전과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목격하며 지쳐간다. 끝내 르완다 내전의 마지막 말로를 목격하고 전 세계에 알리는 위업을 이루지만,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은 온전히 고갈되어 버린다. 그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확인한 수많은 제노사이드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삶의 목표를 상실한 살가두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에겐 잃어버린 낙원과도 같았던 브라질 계곡의 목장으로 돌아간다. 달리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풍요로움을 떠올리며 찾아간 고향 계곡은 전 세계에서 목격했던 것처럼 자연 파괴로 인해 이미 황폐해져 있었다.
 
그는 이제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오직 지금껏 자신이 달리게 해준 원동력이던 푸르른 계곡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살가도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다. 그저 죽은 나무에 싹이 트길 바라며 입으로 물을 머금어 날라 주던 톨스토이의 소설 속 대자처럼, 묵묵히 나무를 심고 가꾼다. 인간의 노력과 자연의 치유력이 어우러진 순간,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남자가 현실에서 실현된다. 지난한 수고 끝에 숲이 살아나고 계곡이 푸르러지자 말랐던 샘이 솟아나고 야생등물들이 돌아온다. 인간에 절망했던 살가도는 자연의 은총에 힘입어 다시 카메라를 잡을 수 있게 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인간을 주제로 사진을 찍진 않지만 그의 상처를 치유해준 자연의 경이, 그리고 자연을 경외하는 존재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중이다.
 
(국내 출간된 자서전 성격의 책 <세바스치앙 살가두, 나의 땅에서 온 지구로>(2014, 솔빛길 출판사)와,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이 본서를 기반으로 작업한 다큐멘터리 <제네시스: 세상의 소금>(2014)에서 관련 내용을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3. 일본에 심야식당이 있다면, 우리에겐 식물카페 온정이 있다
 
"식물카페, 온정" 스틸 이미지 인혁 역 서석규 배우(좌), 진우 역 김우겸 배우(우)

▲ "식물카페, 온정" 스틸 이미지 인혁 역 서석규 배우(좌), 진우 역 김우겸 배우(우) ⓒ 매치컷

 
<식물카페, 온정>의 주인 '현재'는 가게를 찾아온 손님들과 그들의 식물을 보살펴주지만, 그 과정은 '현재'가 과거에 겪은 상처를 치유해주고 그의 '지금'을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현재의 시간과 기억이 지층처럼 퇴적되어간다. 느슨하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척 하지만 이야기는 건축 설계처럼 꽤나 구조화된 셈이다.
 
마감시간을 칼 같이 지키는 가게 방침처럼 영화는 주인 현재가 가게 문을 내리고 바깥세상으로 나가면서 함께 끝난다. 식물카페는 그 공간의 주인을 고립시키는 게 아니라 사진가 살가도의 경우처럼 다시 세상과 '대면'할 수 있도록 휴식을 제공하는 쉼터로 기능한다. 이곳은 세파에 상처받고 지친 이들을 위해 숨 쉴 틈을 제공하는 피난처고, 세상과의 대결을 위한 후방기지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
 
간결한 분량 때문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어쩌면 힐링 물의 상징이 된 일드 <심야식당>처럼 미니 드라마 연작으로 선보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에피소드가 좀 더 두껍게 깔렸으면 조금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상상도 해본다. 각 에피소드가 모여 하나의 지붕과 뼈대를 이루는 구성의 흐름은 선명해서 좋긴 하지만, 집으로 치면 공간이 한두 개 더 마련되어 조금 더 여유로운 느낌이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미련이다.
 
<내가 사는 세상>과 <파도를 걷는 소년> 등에서 사회적 소재와 배경을 기반으로 선 굵은 이야기를 풀어내던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선 드물게) 다른 이들의 각본을 각색해 풀어낸 작업이다 보니, 감독의 전작들을 생각하며 그 연장선상의 작품을 예상했던 이들에겐 약간의 이질감이 들 수도 있겠다. 반대로 <카모메 식당>의 오기가미 나오코 이후 꾸준히 그 영향력 아래 선보이고 있는 치유 계열 영화나 드라마에 익숙한 이들에겐 편안하고 친근한 감정으로 선택될 만한 작업이다.
 
근래 주목받은 독립영화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던 중량급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것도 주목받을 지점이다. 강길우, 박수연, 이가경 배우의 연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연기력을 과시적으로 뽐낼 기회가 드문 스타일의 영화임에도 전개과정을 위해 꼭 필요한 역할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감독과, 그리고 자주 공연했던 배우들과의 합이 딱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강길우 배우의 노래솜씨도 확인할 수 있다).
 
개인적 욕심이라면, 카페 주인 '현재'의 과거 스토리가 조금 더 진하게 풀어내졌다면 그의 좌절과 극복의 드라마가 보다 흥미롭지 않았을까? 에피소드가 조금만 더 추가되었다면 이야기들 간의 연쇄 효과가 보다 흥미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관객의 권리인 상상의 날개를 펼쳐도 보지만, 영화 속 '현재'가 자신과 손님들을 위해 천천히 공들여 끓이고 대접하는 허브 차와 꼼꼼히 작업하는 화분이 선사하는 기운처럼, 슬로 라이프의 치유 계 영화로서 충분히 효능을 보증할 만한 결과물이다.
 
작품정보

식물카페, 온정 Plant Cafe, Warmth
2021|한국|드라마
2021.06.24. 개봉|75분|전체관람가
감독 최창환
주연 강길우(현재) 이가경(시내) 김우겸(진우) 서석규(인혁) 박수연(서진)
출연 김상동, 천정락, 박시우, 김길범, 송현빈, 남가원, 채승우
PD 감정원
각본 김기현, 정유미, 서시현
촬영 전상진
편집 최창환
음악 최창환
제작 컬쳐플랫폼. 매치컷
배급 매치컷
 
2021년 22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부문 상영작
식물카페, 온정 매치컷 최창환 감독 강길우 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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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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