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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선생 사진 홍암 나철선생 사진
▲ 홍암 나철선생 사진 홍암 나철선생 사진
ⓒ 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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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는 대종교를 "종교를 가장한 항일 지하독립운동단체"로, 나철을 그 수괴로 인식하였다.  

중광 당시 그는 47세로 대종교의 최고책임자인 사교(司敎)에 추대되었기 때문이다. '사교'란 교(敎)를 맡은 책임자라는 뜻으로 교직(敎職)을 의미한다. 

대종교는 1909년 11월 12일 직제를 사교ㆍ참교(參敎)ㆍ찬교(贊敎)의 교직과 시교사(施敎師)ㆍ순교원(巡敎員)의 교임을 두는 것으로 설정ㆍ공포하였다.

이날 나철은 다시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되어 명실공히 대종교 초대 중광교조인 제1세 도사교가 된다. 일제가 두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게 된 소이연이다. 대종교는 기유년에 중광을 선포한 1909년 한 해 동안에만 서울에서 다섯 차례나 본부 교당을 옮겨야 했다. 일제의 탄압과 경제적 어려움이 겹친 때문이다. 

나철은 신앙의 자유와 교세의 확장을 위해 만주에 눈을 돌렸다. 1910년 10월 북간도에 대종교 지사를, 같은 해 11월에는 박찬익을 보내 청산리에 시교소를 설치하는 등 만주진출을 서둘렀다. 

특히 1912년에는 나철을 중심으로 박찬익ㆍ박승익ㆍ심근ㆍ현천묵ㆍ백순ㆍ조창용ㆍ기길(나철의 부인) 등이 백두산 북녘 화룡지역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500여 가구가 한꺼번에 입교하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100여 명이 동시에 입교하는 사례도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포교활동이 이루어졌다. 특정 지역이나 마을주민 전부가 입교하는 등 교세는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주석 1)


대종교는 이를 기반으로 교도인 서일(徐一)을 단장으로 채오(蔡五)ㆍ계화(桂和)ㆍ양현(梁玄) 등이 중심이 되어 무장독립운동 단체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우리나라 중국 동북지역 무장독립운동 단체의 효시가 되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군사인력 및 무기의 부족 등으로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교민들을 상대로 민족교육과 대종교 포교 활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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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광단의 명칭에서 '중광(重光)'이란 단군교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나 중광단의 건립 목적은 종교활동 보다는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무장독립운동에 있었다. 그러나 건립 초기 중광단은 군사인재 및 무기의 결핍으로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광단은 먼저 대종교 포교와 학교 교육을 통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제고시켜 반일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11년 6~7월 이정완(李貞完)은 허룽시엔 학성촌(鶴城村)을 거점으로 포교활동을 추진하였으며, 나철은 서일ㆍ계화ㆍ백순ㆍ박찬익 등과 함께 허롱시엔 청파호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서일은 왕칭시엔, 현천묵과 김병덕 등은 엔지시엔에서 각각 포교활동에 전념하여 대종교의 사회적 기반을 확대하여 갔다. (주석 2)


뒤에 다시 쓰겠지만, 대종교는 1914년 총본사를 백두산 인근의 청파호로 옮기고 북간도 각자에 시교당을 설치하면서 신도가 몇 천 명으로 늘어났다. 대종교가 간도 각지에 세운 학교는 단군신앙과 민족교육으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모태 역할을 하였다. 북간도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이렇게 육성된 청년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1919년 만주지역 만세운동, 1920년 청산리 전투를 비롯하여 뒷날 강력한 무장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한 대한정의단 등은 대종교인들이 중심이었다. 중광단에서 설치한 교육기관은 다음과 같다. 

 
중광단에서 설치한 교육기관 일람표 중광단에서 설치한 교육기관 일람표 (〈출전〉박환,「북로군정서의 성립과 활동」,『국사관논총』11, 36쪽, 1990.
)
▲ 중광단에서 설치한 교육기관 일람표 중광단에서 설치한 교육기관 일람표 (〈출전〉박환,「북로군정서의 성립과 활동」,『국사관논총』11, 36쪽, 1990. )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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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박환, 「북로군정서의 성립과 활동」, 『국사관논총』11, 36쪽, 1990.

주석
1> 김동환, 「대종교의 민족운동」, 『종교계의 민족운동』, 90쪽.
2> 김춘선, 「중광단」, 『한국독립운동사사전(6)』, 705쪽, 독립기념관, 200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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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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