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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이룩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귀가 솔깃하지만, 여성들의 이야기는 더욱 관심이 간다.

여성이 읽고 쓰는 일이 지금과 같지 않았던 시절, 생계를 이어가며 글쓰기에 모든 것을 내건 여성들의 이야기는 숭고하다. 이 책 제목이 말해주듯 여성들의 글쓰기는 싸워서 살아남아야 하는 투쟁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외부적인 요소로나 내부적인 요소로나.

이 책에는 마그리트 뒤라스, 도리스 레싱, 마거릿 애트우드, 토니 모리슨, 에밀리 브론테, 나디 고디머, 박경리, 헤르타 뮐러와 같은 소설가와 화가 프리다 칼로, 흑인 대법관 루스 베인더 긴스버그, 사회비평가이자 소설가였던 수잔 손택, 침팬지 연구자 제인 구달 등 총 25명의 여성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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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풍족하게 갖춰진 환경에서 글을 쓴 사람이 얼마나 있으랴. 마그리트 뒤라스는 파산한 집안에서 어머니와 오빠들의 멸시를 받으며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입증했다. 글을 쓰겠다는 딸의 말에 어머니는 "수학 교사 자격증부터 따고나서 정 원하면 쓰려무나, 난 그따위 일에는 관심없다"고 일축해 버린다. 어머니의 멸시와 무시는 뒤라스를 더욱 매섭게 몰아붙였다. 단 한순간도 글을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은 또 어떠한가. 이혼하고 아이 셋을 혼자서 키워야했던 도리스 레싱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간다. 오로지 작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레싱으로서는 모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 그럭저럭 사는 일은 레싱에게 더 견디기 어려운 모멸이었을 터.

프리다 칼로는 차라리 처절하다. 예술가로서 한창 꽃피울 시기, 불운의 교통사고와 그로 인한 합병증들. 평생 짊어져야 했던 고통은 프리다 칼로의 예술혼을 꺾기는커녕 더욱 부채질 했다. 사랑하는 남자, 디에고와의 두 번의 이혼과 사랑으로 인한 상처도 프리다 칼로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그림만큼이나 처절하고 치열하다. 그리고 죽기 직전 스스로에게 '나는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고백한다.

미국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는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며 시를 쓴 실비아 플라스. 그녀는 결혼 후부터 생활고에 시달렸다. "앞으로도 결코 글을 써서 먹고 살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는 유일한 직업이 그것인데도... 에너지와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고 글쓰는 작업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돈을 벌려면 뭘 해야 할까?"라고 토로했다. 공감 가는 대목이다.

글을 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

실비아 플라스에게 돈이 없는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은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실비아 플라스는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면 지금까지 쓴 글들을 세상에 남기고 먼저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자살한 여자가 아니라 삶의 전부를 글쓰기에 걸었던 여성시인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의 시 전집이 출간되었고 퓰리처 상을 받았다. 사후에 출간된 책으로 퓰리처 상을 받은 경우는 실비아 플라스가 유일하다.

한국의 작가로는 박경리가 소개되었다. 박경리는 전쟁에서 남편을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자식을 잃었다. 자식을 보낸 단장의 고통 속에서도 펜을 들었다. 오로지 쓰기 위해 살았고, 살기 위해 썼다.
 
"흠결 없고 상처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았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사람이므로 일생 동안 수많은 실수를 거치며 성공과 실패, 성취와 좌절을 오갔다. 결국 그들은 모두 좋은 글을 남겼다. 앞으로 걸어갔다. 어떤 경우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글과 말의 힘을 믿었다. 불행이나 불운이 반드시 살아서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결코 꺾을 수 없음을 자신들의 삶으로 증명했다."(프롤로그 중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25명 작가들의 삶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결핍이다. 결핍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이들은 결핍을 오히려 삶의 강한 의지와 글쓰기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켰다는 차이가 있다.

돈의 결핍, 애정의 결핍, 인정의 결핍, 정의의 결핍. 자신의 '결핍'을 자신에게만 국한 시키지 않고, 문학 속으로 끌고 와서 '우리'의 문제로 얘기 건넸다는 점이 일반인들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작가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싶다.

둘째는 도전이다. 그들은 기존 관념이나 가치에 도전했다. 체제에 순응하고 권위를 지양하는 삶에서는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여성의 낙태문제, 종교문제, 환경문제를 디스토피아 관점에서 다룬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나 흑인 여성의 처절하고 비참한 삶을 다룬 토니 모리슨의 작품들. 루마니아 독재 체제에 저항하고 그 추악한 현실을 폭로한 헤르타 뮐러의 작품들. 그들의 작품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았던 '시대의 목소리'였다.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썼던 여자들

독재 체제를 비판하거나 현실의 부조리를 지적한 글과 작가들의 삶도 위대하지만,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쓰는 여성들의 삶이다. 도리스 레싱이 그랬고, 박경리가 그랬다. 그것만큼 절박하고 간절한 이유가 또 있을까. 단순히 '생계'에 불과하다고 누가 하찮게 여길 수 있으랴.

글쓰기는 그들 삶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마침내 그들이 도착해야 할 궁극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칭찬 또는 혹평에도 의연할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곳은 자신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레싱은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도 심드렁했다. 행여나 앞으로 글 쓸 시간이 줄어들까 봐 그 걱정만 했다."
 
얼마나 멋진 일인지. 글쓰는 여자는 의연하다. 흔들리지 않는다. 속으로 울지언정.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 글쓰기로 한계를 극복한 여성 25명의 삶과 철학

장영은 (지은이), 민음사(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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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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