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장난을 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친한 사람에게 다가가 장난스레 툭 치곤, "내가 아니라, 내 손이 그랬어"라고 말하는 유치함. 우리가 이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건, 손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손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내 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한 경우 그건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손이 독자적인 판단과 사유를 할 능력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이번에 소개할 두 영화는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 곤 사토시 (1963 ~ 2010)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췌장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 감독, 곤 사토시 (1963 ~ 2010)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췌장암으로 사망하고 만다. ⓒ 곤 사토시


<퍼펙트 블루>(1997)와 <파프리카>(2006)를 만든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방황한다는 점이다. 위에서 손을 예로 든 것은, 그 주인공들의 고민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뇌(꿈)가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손(현실)이 움직이는 것인데, 만약 그 손(현실)이 뇌(꿈)를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때도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라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영화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짧게 정리해보자.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꿈과 현실의 관계로 치환하면 이렇다. "현실이지만 꿈이 아니다" 혹은 "꿈이지만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 물음의 전제를 되짚어 보자. "현실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내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감독은 그렇게 묻고 있다.

 영화 <파프리카>(2006)의 포스터

영화 <파프리카>(2006)의 포스터 ⓒ 매드하우스


<파프리카>(2006)

사토시 감독의 유작인 <파프리카>는 위의 질문 중 "현실이지만 꿈이 아니다"를 묻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현실에서 꿈으로 넘어가는 것이 주가 된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작품 내에서 주인공의 연구소에서 개발된 'DC-MINI'라는 기기는, 인간의 꿈을 기록하거나 타인의 꿈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 있다. 주인공인 '치바 아츠코'는 그 연구소에서 정신과 의사로 근무하며 기기를 통해 남몰래 환자들을 치료해 오고 있다. 그때, 꿈속에서 그녀는 다른 인격인 '파프리카'가 된다.

현실에서의 그녀가 냉정하고 이성적이라면, 꿈속에서의 그녀는 온화하고 감성적이다. 말하자면 꿈과 현실에서의 성격이 각각 반대이다. 그리고 다른 인물들도 그렇다. 연구소의 이사장인 '이누이'는 현실에서 'DC-MINI'가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며 탐탁치 않게 여기지만, 그것을 훔쳐 달아난 꿈속에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지배자가 되려 한다. 동료 연구원 '모리오'는 평소 주인공을 짝사랑하고 있지만, 정작 DC-MIMI 개발자 '토키타'와 어울리는 주인공을 보며 질투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점잖게 행동하지만, 꿈 속에서는 이사장과 연합해 그녀의 꿈속 자아인 '파프리카'를 취하려 한다.

그런데 등장인물 중 주인공에게 치료를 받는 환자 '코나카와 토시미'는, 꿈속에서도 한결같음을 유지하며 그녀를 도와주니 위의 사례에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형사라서 일종의 직업윤리로 행동하기 때문일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토시미에게는 젊은 시절 함께 영화를 찍던 친구가 있었는데, 사이가 틀어진 후 뒤늦게 부고를 듣게 된다. 토시미는 그로 인한 죄책감에 주인공에게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그가 반복해서 꾸는 악몽은 이렇다. 여러 이야기가 섞여 나오지만, 그중의 하나는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총격장면이다. 그 친구가 총에 맞아 쓰러지고, 뒤늦게 달려가 보지만 범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악몽을 계속해서 꾸지만 토시미는 단 한번도 친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영화 <파프리카>의 한 장면

영화 <파프리카>의 한 장면 ⓒ 매드하우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꿈이란 욕망이라 말할 수 있다. 각각 두 세계의 붕괴를 통해 장수하려는, 자신의 친구를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짝사랑을 이루려 하는 이의 욕망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비슷한 욕망이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도 꾹 참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보고 싶고, 사랑하는 그녀에게 고백하고 싶고. 물론 우리는 그것을 마음 속에 고이 담아두고 산다. 그것을 실현하는 순간, 현실세계는 엉망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펼치는 상상이다. 만약 우리가 자제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말하자면 이 영화는 작품 속의 인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가진 내면의 욕망을 현실 세계로 이끌어 내려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손을 빌려 표현하자면, 손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이유를 알 수 없어 곰곰이 생각해 보는 상태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떻게 숨쉬고 있는가? 아마도,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숨쉬기가 몹시 불편해질 것이다. 손도 그렇다.

결국 우리의 현실이 꿈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중간 과정을 알 수가 없으니 우리는 몹시 답답하다. 그 과정은 마치 숨쉬기를 의식하는 것과 같아서, 생각할수록 점점 고뇌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이 나오지 않고, 우리는 불안을 느낀다. 내가 지금 걷는 길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불안, 지금 서 있는 곳까지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음에 대한 불안이다.

 영화 <파프리카>의 한 장면

영화 <파프리카>의 한 장면 ⓒ 매드하우스


그런데 이 영화는 우리에게 "불안해 하지 말라"고만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불안해 해도 된다"라며 다독여 주기도 한다. 그것을 드러내는 인물이 토시미 형사다. 앞서 이 영화가 그리는 꿈의 세계가 욕망을 드러내는 공간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는데, 토시미만큼은 꿈에서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다. 토시미가 친구가 죽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는 게 욕망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건 무척 예리한 질문이긴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주체로서의 욕망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은 환자를 치료하려 하고, 이사장은 세계를 지배하려 하며, 모리오는 그녀와 사귀고 싶어한다. 하지만 토리오는 친구가 죽는 것을 막고 싶어한다.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것이다. 말하자면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들춰지는 셈이다. 그런데 보통 욕망이 들춰진다고 하면 자신의 치부가 들통난 것처럼 몹시 부끄러울 것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토리오를 부끄러운 인물로 내세우지 않는다. 영화의 서사는 현실에서 꿈, 꿈에서 현실, 이어서 꿈과 현실이 혼합되는데, 그 과정에서 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건 토리오 뿐이다. 왜 그러하느냐면, 꿈과 현실이 뒤집어지며 주체와 객체의 위치도 바뀌기 때문이다. 토리오는 객체에서 주체가 되며, 다른 인물들은 주체에서 객체가 된다. 우리가 내세우던 꿈이라는 게 오히려 우리를 옭아매다니 정말로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본 욕망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영화 <파프리카>의 한 장면

영화 <파프리카>의 한 장면 ⓒ 매드하우스


욕망의 주체 (주인공) – 욕망의 객체 (토리오)
욕망의 객체 (토리오) – 욕망의 주체 (주인공)


결과적으로 토리오는 파프리카를 욕망(꿈)에서 벗어나게 돕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복되던 악몽 속의 범인을 총으로 쏘는 것에 성공한다. 마침내 그를 괴롭히던 욕망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다음으로, 파프리카는 꿈에서 깨어 현실의 아츠코가 되지만 이내 현실에 꿈이 침투한 것을 알아챈다. 이때, 아츠코와 파프리카는 같은 인물임에도 현실과 꿈이 섞인 상태이기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사장이 그토록 원하던, 이러한 상태는 몹시 위험하게 그려진다. 둘은 서로의 위치에서 역할을 수행하며 이사장을 물리친다.

이쯤해서 우리는 감독이 이 영화에 흩뿌리는 욕망이라는 것의 의미를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욕망은 우리가 어딘가를 향하게 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피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이사장이 주장하던 것처럼 무작정 섞이기만 하면 안된다. 두 세계가 섞이면 굉장한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서로 분리된 상태로 적절한 협업을 주고 받는 것이 진정으로 조화로운 상태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소소한 불만을 하나 품을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손이 움직이는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영화에서는 그게 DC-MINI라는 기기로 명확하게 표현되며, 우리가 그렇듯이 영화 속 그들도 그것을 몹시 탐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는 그런 기기가 없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손이 움직이는 이유는 없다, 혹은 굳이 있어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유를 몰라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숨을 쉬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퍼펙트 블루>의 포스터

영화 <퍼펙트 블루>의 포스터 ⓒ 매드하우스


<퍼펙트 블루>(1997)

사토시 감독의 최초의 장편영화인 <퍼펙트 블루>는 위의 질문 중 "꿈이지만 현실이 아니다"를 묻는 영화다. 동시에, <파프리카>가 명쾌히 내놓지 않았던 "손이 움직이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키리고에 미마'는 '참'이라는 3인조 걸그룹으로 활동하던 중, 소속사의 말대로 배우로 전향하게 된다. 미마는 계속 아이돌을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고, 매니저 '토키오리 루미'도 전직 아이돌이었기에 미마의 기분을 잘 안다며 위로해준다.

미마는 전직 아이돌이라는 꼬리표 탓에 드라마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 그러한 이미지의 탈피를 위해 강간 장면이나 누드 화보와 같은 것도 촬영하게 된다. 아이돌 시절부터 있던 스토커는 미마가 순수함을 잃었다며 계속해서 위협을 가하고, 그때마다 미마는 내면에 있던 아이돌의 꿈을 자꾸만 떠올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촬영 중이던 드라마에서 미마의 배역은 정신병에 걸린 환자였고, 드라마의 인물에 몰입한 나머지 점점 정신이 혼란스러워진다.

이 영화는 감독의 첫 작품이니 그만큼 세계의 심도가 깊고, 유작인 <파프리카>보다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만큼 표현의 수위가 높기도 하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송곳으로 사람을 찌르는 이미지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주인공이 강간 장면을 촬영하는 장면에선 그것과 아이돌의 꿈을 교차로 보여주며 고통을 배가한다. 물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그렇게 표현의 수위가 높아야만 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청소년 관람불가이기에 그렇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영화가 전제로 두는 상황과 연관이 큰 것으로 보인다. 다시금 영화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영화에서 미마는 성공을 위해 더럽혀지는 자신을 보며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그런데 이때, 내면에 있던 아이돌의 꿈이 환상으로 나타나 미마를 괴롭힌다. 그 허상은 지하철의 창문이나, 홀로 남은 방에서 미마에게 말을 건다. 말하자면 꿈에 현실이 침입하는 것이다.

 영화 <퍼펙트 블루>의 한 장면

영화 <퍼펙트 블루>의 한 장면 ⓒ 매드하우스


아이돌이 꿈의 이미지인데 어찌 현실이 꿈에 침입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지금 미마가 원하는 것은 연예인으로 성공하는 것이다. 그것이 미마의 꿈이고, 아이돌은 버려진 현실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현실의 공포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공포는 단순히 환상에 지나지 않고 구체화 되어 생명을 위협할 지경에 이른다. 미마를 더럽힌 인물을 죽이던 스토커가, 현재의 미마를 죽여 과거의 순수했던 모습으로 남기려 한다. 

이것을 이렇게 말해볼 수 있다. <파프리카>에서 보여준 "현실에 꿈이 침입"하는 것보단 이 영화에서 "꿈에 현실이 침입"하는 게 더욱 잔혹하다고. 그것은 표현의 수위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잔혹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손이 움직이는 이유"에 대해 말할 차례다. 현실은 어떻게 꿈에 침입하는가?

아주 중대한 스포일러지만 이야기해야 한다. 이 영화에는 두 명의 미마가 있다. 하나는 아이돌로서의 미마고, 다른 하나는 배우로서의 미마다. 말했다시피 두 인격 중, 아이돌의 모습은 탈락하고 만다. 그런데 탈락한 아이돌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 미마의 내면에서, 그리고 루미의 내면에서도 말이다. 루미는 예전에 아이돌을 하다 그만두었고, 그에 따라 버려진 미마의 꿈을 받아들여 스스로 미마의 두 번째 인격이 되어버린다.

잔혹한 송곳 살해와, 인터넷에서 미마를 사칭해 일상을 기록해 놓는 둥, 그동안 스토커가 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루미의 짓이었다. 그럼에도 루미가 미마를 살해하려고 하는 장면 전까지, 우리는 그녀를 쉽사리 욕할 수가 없다. 루미가 했던 것은 미마의 꿈을 지키려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곧 루미의 꿈이기도 했고, 방법이 잘못되었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두 여자가 사실상 하나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영화 <퍼펙트 블루>의 한 장면

영화 <퍼펙트 블루>의 한 장면 ⓒ 매드하우스


작품 내에서는 유독 거울이 많이 나온다. 위에서 말했던 지하철 창이나, 집안에 있는 거울, 길거리의 윈도, 어항에 비치는 모습 둥. 당연하게도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비치기에 또 다른 자신을 뜻하는 은유로 사용되고, 실제로 그 반사되는 모습에서 '아이돌로서의 미마'가 나타나 미마를 괴롭힌다. 그런데 작품이 진행되면 그 환영이 사실은 루미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루미와 미마는 다른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영화를 단순하게 보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거울 속의 '나'는 자신의 내면세계이기 때문에 절대 현실화될 수 없는데, 이 영화에서는 내면의 '나'가 현실의 '나'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은 <파프리카>에서 보았던 것처럼 꿈과 현실이 혼합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곳은 우리의 무의식이므로 그렇다.

라깡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실재계의 질서를 따른다. 실재계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과 꿈의 세계,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잉여공간이다. 그만큼 '진짜(The Real)' 마음이 존재한다. 우리가 점심시간에 동료와 밥을 먹는다고 치면, 밥을 먹는 식당이 현실이고 퇴근해서 편안하게 누워있는 상상이 꿈이다. 이때 배가 고픈 마음이 실재계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러한 욕망은 <파프리카>가 말했듯이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 영화는 그러한 것에 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루미는 다른 스토커(미마니아)와 결합해 미마를 협박한다. 그때, 미마니아는 미마를 따라다니며 관찰하는 역할이다. 작품의 초반부터 미마니아는 여러 모습으로 미마를 관찰한다. 콘서트장의 경비원으로, 촬영을 구경하던 시민으로 말이다. 이러한 것은 영화의 연출과 맞물려 미마니아가 미마를 협박하는 무언가라는 암시를 준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정말로 자신에게 위협이 되던 것은 루미였음이 드러난다. 루미가 미마니아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루미는 미마의 매니저라는 위치에서 미마를 관찰하며 완벽한 스토킹을 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되려고 한다.

 영화 <퍼펙트 블루>의 한 장면

영화 <퍼펙트 블루>의 한 장면 ⓒ 매드하우스


여기서 인물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미마(꿈) – 루미(현실) – 미마니아(무의식)

무의식은 평소에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으나 현실과 결합할 때 꿈에 해를 끼친다. 현실은 꿈이 되려 하며 그 과정에서 꿈을 죽이려 한다. 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자꾸만 현실을 떠올린다. 여기서 우리는 위에서 했던 질문을 되 내여 볼 필요가 있다. 분명 뇌(꿈)가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손(현실)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파프리카>는 손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퍼펙트 블루>는 이렇게 묻는다. 왜 꿈이 현실에 명령해야 하는지 말이다.

우리의 뜻대로 현실을 움직이자.

이 영화에서 이미지와 상징 같은 것을 찾아내려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두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 개인에게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살면서 지나치는 모든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또한 그 누구도 우리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고, 그게 나 자신이라도 그렇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 영화에서 무언가를 느낀다면, 그게 당신의 삶에 대해 느끼는 질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그만둘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와 브런치에 중복게재 하였습니다.
영화 곤사토시 파프리카 퍼펙트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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