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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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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운 일행은 동이 트자마자 마차를 달렸다. 표국의 호위마라 그런지 힘이 셌고 지구력도 좋았다. 반 시진 정도 달리자 운부산 산길로 접어들었다. 경사진 길을 오르내리며 얼마쯤 가자 협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른쪽은 경사가 심한 비탈길이고 왼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절벽 아래로 계곡물이 호호탕탕 흘러갔다.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유람을 왔으면 감탄이 절로 나오고 수련을 왔다면 호연지기가 절로 솟겠건만, 마음 바쁜 그들에게는 그저 불편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길이다. 길이 회돌아 지는데 건너편에 빠른 속도로 말을 몰고 오는 사내가 보였다. 험한 산길을 저 정도 속도 달리는 걸 보면 기마술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검은 복장을 한 사내인데 그가 탄 말도 검었다. 저 속도라면 일다경이 안 돼 마차를 따라잡을 것 같았다.

두두두,

검은 말을 탄 사내는 어느 새 관조운 일행이 탄 마차와 삼 사장 떨어진 곳까지 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가 탄 말은 면상에 흰 털이 세로로 나있다. 마치 흰 천이 공중에 떠서 날아오는 것 같다. 관조운이 마차를 길  옆으로 비켜 주었다. 좁은 산길이이서 자칫하면 부딪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내는 말의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더니, 길을 비켜준 사람의 호의를 무시하고 휙 지나쳤다. 너무 빨리 지나가는 바람에 알 순 없었지만 굳게 다문 입과 각진 턱이 관조운에게는 왠지 낯이 익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내의 말이 일으킨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혁련지가 흥, 하고 냉소를 지었다. 

"정말 예의 없는 자로군요"
"어깨에 검을 멘 걸 보니 강호인 같던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관조운이 말대꾸를 했다.

"험한 산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을 보면 기마술이 보통 아니군, 단지 말을 잘 다룬다는 수준을 넘어 말과 호흡을 맞출 줄 아는 자야.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라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곳에선 달리려고 하질 않지. 낭떠러지나 굽이치는 길도 마찬가지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길을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게 한다는 건 말의 두려움을 없애줄 줄 아는 자야. 흔히 말하는 인마일치(人馬一致), 사람과 말이 한마음 되는 경지로 기마술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지."

담곤이 말했다.

"이랴!"

관조운이 고삐를 당기자 말들이 그동안의 게으름이 미안하다는 듯 마차의 속도를 높였다. 담곤이 이름 모를 사내의 기마술을 칭찬하자, 관조운에게 호승심이 생긴 걸까. 마차 하나 겨우 다닐 좁은 길이지만 마차의 말도 표국의 호위마답게 두려움이 없이 앞서간 말을 향해 힘차게 발을 굴렀다.

산길은 조금씩 험해지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을 이 각(刻) 정도 오르자 고갯길 정상이 나왔다. 그 너머로 내리막길이 뱀의 몸통처럼 구불구불 펼쳐졌다. 말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말도 쉴 겸해서 마차를 멈췄다. 운부산의 절경이 계곡 사이로 펼쳐졌다. 두루마리 화폭을 세로로 펼친 것처럼 선경(仙景)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계곡 사이로 운무가 아련히 솟아오르고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새들이 유유히 비행하고 있다. 일행은 쫓기는 몸이라는 것도 잊고 아, 하고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선경이 펼쳐진들 무엇하랴. 당장 마음이 뻘밭인데. 말들의 호흡이 잦아지자 관조운이 고삐를 움켜쥐었다. 말들이 히힝, 하며 다시 움직였다.

"자, 이제부터 내리막길이니 고삐를 단단히 잡게."

담곤이 주의를 주었다.

내리막길이라 그런지 마차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말들이 제멋대로 달렸다간 굽이진 길에서 방향을 틀어야 할 때 자칫하면 걸빵이 벗겨져 말과 마차가 분리되거나 운이 없으면 마차가 옆으로 넘어지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내리막길일수록 말 다루는 기교가 더 능란해야 한다. 관조운은 긴장해서 말고삐를 죄었다.

"사형, 내가 몰까요?"
혁련지가 눈치를 채고 말했다.

"아냐, 사매. 나 혼자서도 충분해."

관조운이 자존심을 내세웠다. 몇 굽이돌자 비교적 곧고 긴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관조운은 손에 힘을 빼고 긴장을 풀었다. 말들은 내리막에 곧은길이 나타나자 신이 나는지 갈기를 세우고 달렸다. 너무 빨리 달린다 싶어 관조운이 고삐를 죄려는데 혁련지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사형, 저 앞에 뭐예욧!"

관조운이 바라보자 길 양편 나무와 나무 사이에 땅에서 한 자 정도 높이로 밧줄이 매어져 있다. 밧줄 색깔이 길바닥과 비슷해 자칫하면 지나치기 쉬웠는데 혁련지가 용케 발견한 것이다. 한 자면 말의 발목과 무릎 사이 높이다. 그대로 달렸다간 여지없이 밧줄에 걸려 말들이 나뒹굴 것이다. 그렇다고 급히 세우면 뒤에서 달려오던 마차가 관성에 의해 말들을 들이박게 된다. 완만하게 속도를 줄여 말과 마차를 같이 세워야 하는데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 짧았다.

말들은 관조운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계속 속도를 냈다. 처음 발견했을 때 오(五) 장거리였던 밧줄이 어느새 삼(三) 장 앞으로 다가왔다. 담곤도 눈치를 채고 마부석으로 몸을 기울이며 정면을 뚫어지게 보았다. 말과 밧줄 사이가 이(二) 장으로 좁혀졌다. 관조운의 서툰 고삐질에 말들은 더욱 속도를 냈다. 밧줄이 일(一) 장 앞에 놓여있다. 눈 깜짝할 사이면 말들은 고꾸라지고 마차는 넘어질 것이다. 이왕지사 될 대로 되라는 맘으로 관조운이 힘껏 고삐를 당겨 말들을 세우려는 데 담곤의 음성이 들렸다. 

"말을 세우지 말고 그냥 달려. 뚫고 가도 돼!"
단호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다.

관조운은 사숙의 말을 따라 고삐를 쥔 손에 힘을 뺐다. 말들은 달리던 관성대로 밧줄에 아랑곳 않고 부딪쳐 나갔다. 밧줄이 한 마리의 정강이에 걸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한 마리의 정강이에 걸려 팽팽해졌다. 순간 밧줄이 툭, 하고 끊어져버렸다. 말들은 정강이에 닿는 갑작스런 감각에 놀라 비틀거렸다. 그 영향으로 마차가 크게 휘청하더니 끼익 끽하는 소리가 났다. 바퀴와 굴대가 어긋나는 소리다. 자칫하면 바퀴가 빠져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말들이 이내 중심을 잡고 곧바로 나아가자 바퀴도 제자리를 잡았는지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관조운이 꽉 고삐 쥔 손을 풀었다. 손바닥엔 땀이 흥건히 배었다.
혁련지가 휴, 하고 한숨을 돌리며 담곤을 돌아보았다.

"어찌 된 일이죠? 사숙어른."
"기적이 일어난 건 아냐. 앞에 있는 말이 호위마(護衛馬)라는 사실을 자네들이 잊어서 그런 거지."

"호위마 정강이는 무쇠로 돼 있답니까?"
혁련지가 의문이 가시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와 비슷해. 표사들이 표행(剽行)에 나설 때 선두에 서는 호위마는 정강이에 칼날을 댄 각갑(脚鉀)을 씌운다네. 이를 투갑(套鉀)이라고 하지. 도적들이 산길이나 한적한 길목에 저런 식으로 줄을 매놓고 말들의 다리를 부러뜨려 놓곤 하는데, 거기에 대비해 선두에 선 표사들의 말은 모두 투갑을 장착한다네. 표국을 출발하기 전에 총관사에게 체력 좋은 호위마를 마차에 붙여달라고 했더니, 투갑까지 채워서 보냈군, 그래."

혁련지가 말의 다리를 자세히 보니 과연 정강이가 주머니로 싸인 듯 두툼해 보였다. 말의 다리 색깔과 똑같은 천을 사용해 주의 깊게 살피지 않는 한 쉽게 알아 챌 수 없었다. 밧줄을 끊느라 정강이를 덮은 천이 세로로 베어졌고 그 사이로 날카로운 날이 씨익 웃고 있다.

담곤의 재치로 위기를 모면하기 했지만 생각만 해도 등골 오싹할 일이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앞서 이런 식의 공격을 준비를 했다는 건 일행의 행선지를 누군가가 미리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공격을 준비했던 자가 누구든 간에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알면 제이 제삼의 공격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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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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