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1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혁련지는 잠시 딴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산장까지 가지 말고 적의 의표를 찔러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그러나 돌아간들 어디로 갈 것인가. 관조운과 자신은 쫓기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어떤 문제를 풀러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공격은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사부님이 남기신 숙제는 영영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혁련지는 아무도 모르게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내리막길이 끝이 나고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길은 협곡을 따라 구불구불해졌다.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다시 계곡에 울려왔다. 메아리가 협곡에 울려퍼지는 바람에 말발굽 소리가 일행의 가는 길 앞에서 나는 것인지 뒤에서 오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길은 굽이가 심해지고 다시 내리막길로 바뀌었다.

혁련지는 생각했다. 만약 앞에서 적이 길을 막고 있다면 한판의 드잡이질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무예를 할 줄 아는 자는 지금 자신 밖에 없다. 사형은 공자왈 맹자왈 하는 입 밖에 없고, 사숙은 무공을 잃어버린 한낱 노인에 불과하다. 자신 역시 검을 놓은 지 사년이나 되었다. 간혹 사죽헌에서 검을 휘두른 적은 있지만 수련이라기보다는 검무(劍舞)에 가까운 유희였다.

상대가 몇 명이나 될지, 상대의 무공이 어느 수위가 될지. 불안감이 계곡의 운무처럼 피어올랐다, 혁련지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나는 강호의 명문 아미파의 절학비기를 연마했고, 일운상인 모충연의 검법을 전수 받았어. 겨뤄보지 않고는 승패를 알 수 없고, 부딪쳐보지 않고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게 강호의 일. 그래 일단 부딪쳐보는 거야.  

발굽소리는 의외로 뒤에서 들렸다. 일행이 뒤를 쳐다보자, 예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검은 말을 타고 막 모퉁이를 돌아 달려오고 있다. 마차가 보이자 검은 옷의 사내는 등에서 검을 뽑았다. 마상에서 발검(拔劍)하는 솜씨만 보아도 그 자가 예사 고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계곡 사이로 비친 햇살에 사내의 손에 쥔 검이 반짝했다.

혁련지는 이 자를 상대할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부석과 수조 사이의 빈 공간으로 넘어갔다. 사내가 마부석에 앉은 관조운에게 검을 휘두르기 전에 자신이 먼저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검이 없었다. 비룡표국에 잠입하면서 작천방 배설에게 검을 맡겨놓고 왔기 때문이다. 수조 안을 살피니 기다란 장대가 있다. 표국을 빠져나오기 전 금의위 위사가 수조 안을 휘저었던 장대다. 검은 옷 사내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혁련지는 장대를 창처럼 잡고 거룡세(擧龍勢)를 취했다. 그러나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중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담곤이 혁련지가 앉았던 마부석으로 건너가더니 마부석 밑을 뒤져 두 자 길이의 대나무 통을 꺼냈다. 양손으로 대나무통을 잡은 그는 혁련지 쪽으로 돌아섰다.

"사질, 이걸 받아!"
대나무통을 혁련지에게 건넸다.

혁련지가 건네받으려는 순간 마차가 덜컹하며 흔들렸다. 그 바람에 혁련지가 중심을 못 잡고 통을 놓쳤다. 대나무통이 수조의 난간에 부딪치면서 마개가 열리자 안에 있는 물건이 와르르 쏟아졌다. 대부분이 수조 안으로 떨어졌다. 뽀족하고 날카로운 무쇠침이 마름모꼴로 튀어나온 철질려(鐵蒺藜)다. 검은 옷의 사내는 거의 마차를 따라붙었다. 사내는 마차 옆을 통과해 마부를 공격하려는 듯 말 한 마리 겨우 빠져나갈 공간 사이로 말을 몰았다. 왼쪽으로는 한 발만 내딛어도 천 길 낭떠러지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몰았다.

담곤이 소리쳤다. 
"저 자의 말 앞에 뿌려!"

그러나 혁련지의 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숙이 건네준 것을 뿌리려면 수조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사내의 말은 거의 마차와 같이 달렸다. 혁련지는 수조에 들어갈 틈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밑을 쳐다보니 철질려 두 개가 마차 바닥에 있다. 그녀는 발로 차서 막 옆을 지나가는 사내의 말 앞쪽에 떨어뜨렸다. 동시에 장대를 잡고 사내를 향해 휘둘렀다. 순간 흐어어엉, 하는 이상한 괴성이 협곡에 울려퍼지더니 사내와 말이 함께 낭떠러지 아래로 날아갔다. 혁련지는 자신의 공격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장대에 무엇인가 닿는 느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내와 말이 갑자기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사내가 갑자기 없어지자 한숨 돌린 관조운이 마차의 속도를 줄였다. 

"어찌된 일이야, 사매?"
관조운이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사형."
혁련지가 힘없이 대답했다.

"질려가 박혔어. 발바닥에 쇠침이 박히니 말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 순간적으로 뛰어올랐는데 그곳이 마침 천길 낭떠러지였던 거지. 상제(上帝 : 옥황상제)께서 우리 손을 들어주었어."

담곤이 말했다.

"질려도 표사의 보호무긴가요?"
"표국의 모든 마차는 마부석 밑에 질려가 비치돼 있어. 도적들이 추격해 오면 따돌리기 위함이지." 

"그런데 저 자가 왜 우리를 공격하려 했을까?"
관조운이 말했다.
"……."  
모두들 거기에 대한 답을 알 수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자가 탄 말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사형?"

혁련지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글쎄, ……난 별루 기억이 없는 걸. 사매."

"소주(蘇州) 마장(馬場)에서 우리가 한혈마를 살 때, 세 마리 중 남은 한 마리가 방금 전 괴한이 탔던 말 아니었던가요? 전신이 새까만데 면상에만 하얀 줄무늬가 있어서 인상이 깊었어요. 제가 검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선택하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그 말이 확실해요. 말 종류도 한혈마임이 틀림없고요."

"사매가 그렇게 말하고 보니 그 말 같기도 하구먼. 하지만 그 한혈마는 야생마였잖아. 우리도 며칠 타 봐서 다루기 힘들다는 걸 알잖아. 근데 좀 전의 그 자는,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길들인 말을 타는 것 같았어."

"글쎄요……. 그것까진 제가 모르겠고, ……아무튼 소주의 마장에서 본 말이 틀림없어요."

혁련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관조운은 고삐를 잡은 채 골똘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끈을 잡으려하는 표정이다. 이윽고 곁에 앉은 혁련지를 힐끗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실은 너무 어렴풋해서 말은 안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마상에 있던 자가 나를 은화사에서 구해준 자와 비슷한 것 같은 느낌도 들어. 그때는 지하이고 워낙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지만 왠지 그자 같아."

"사형을 구해준 자가 지금에 와서 우리를 공격한다……. 그건 모순되는 행동 아네요?"

이번에는 혁련지가 생각의 끈을 찾아 의식의 늪을 휘젓는 표정을 지었다. 마침내 끈을 찾았다는 듯 나직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사형을 사로잡기 위한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어요. 저 자는 사부님이 남기신 유언의 내용이 뭔지를 사형에게서 알아내고 싶었던 거예요."

관조운이 고삐를 잡은 손으로 무릎을 쳤다.

"그래, 사매 말이 맞아! 사부님이 운명하시자마자 내가 은화사에 연행되는 바람에 유언 내용이 무언지 알 길이 없었고,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탈출 시킨 거였어. 저 자는 내가 필요했던 게지. 그렇다면 저 자도 금릉에서부터 소주, 개봉, 정주까지, 그동안 내 뒤를 쫓았다는 결론 아냐? 은화사, 금의위, 무림맹, 여기에 이름 모를 괴한……, 모두가 나를 쫓는구먼."

관조운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사형의 추론이 맞는 것 같아요. 저 괴한의 정체가 무엇이건 현재로선 사형의 뒤를 쫓는 자라면 사부님의 유언 때문일 것이고, 그건 궁극적으로 무극진경의 소재 때문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정작 내가 아는 건 하나도 없는데."

관조운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자, 이럴 때가 아냐, 빨리 산장에 가서 다음 일을 의논해 보자고."
담곤이 분위기를 추슬렀다. 

한숨 돌린 일행은 마차 하나 겨우 빠져 나갈 산길을 조심스레 몰고 나갔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하늘은 점점 멀어졌다. 흑의인이 사라진 낭떠러지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태그:#무위도 55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